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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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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화담론] 지구촌의 실존적 위기와 평화
    저자
    김유철 (덕성여자대학교 조교수)
    발간호
    2021-03
    15년여 전 한 여성 목회자로부터 선물 받은 책을 이제 꺼내 읽는다. 신학자 샐리 맥페이그(Sallie McFague)가 1987년 쓴 『어머니, 연인, 친구』(번역서명)라는 책이다. 저자는 그 책에서 인류의 절박한 위기에 부응하는 신학의 역할을 제안하기 위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맥페이그가 말하는 인류의 절박한 위기란 ‘생태학적 핵(위기) 시대’를 말한다. 그는 이원론에 기초한 위계적이고 배타적인 기존의 신학 패러다임은 이런 위기 극복에 알맞지 않다고 진단하고, 어머니, 연인, 친구라는 하나님 모델을 제시하며 일원론에 기초한 수평적이고 포용적인 패러다임을 제안한다. 35년여 전에 쓰인 책이 지금에도 적절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코로나19 사태로 지구촌이 하나의 운명공동체인 것처럼 보인다. 코로나19 사태의 세계적 유행, 일명 팬데믹(pandemic)으로 인류와 지구촌은 위기에 빠진 것이 분명하다. 그 미래를 낙관하기 어려운 점도 위기의식을 증폭시킨다. 그러나 지구촌 위기의 원인이 이 하나의 전염병으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심각성이 크다. 기후위기가 더 큰 원인일 수 있고, 거기에는 성장주의와 소비주의, 나아가 인간이 인간 이외의 존재에 대한 지배의식이 작용하고 있다. 다양한 형태의 분쟁, 특히 핵전쟁 위험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기후·보건위기가 겹친 오늘날 지구촌이 ‘실존적 위기(existential crisis)’에 직면했다고 말하는 것이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인식에 인류가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적절히 대응하고 있는가? 이런 문제의식에서 평화를 다시 생각해보고자 한다.   지구촌의 실존적 위기 1) 분쟁 및 군비 증강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매년 세계 분쟁 및 평화 동향을 SIPRI YEAR란 책으로 묶어낸다. 2020년 상황을 담은 2021년판 보고서에 따르면 국제분쟁은 39개국에서 발생했다. 대부분의 분쟁은 내전이고 단지 두 분쟁(인도-파키스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이 국가간 국경분쟁이다. 나머지 두 분쟁은 이스라엘-팔레스틴, 터키-쿠르드 간 장기분쟁이다. 전해보다 5개가 늘었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20개 분쟁이 일어났다. 그 20개 분쟁 중 18개에서는 2019년보다 사상자가 더 늘었고, 전체적으로는 전년 대비 41% 늘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중동 및 북아프리카(MENA)보다 사상자가 많은 고질적인 분쟁지역이다. 2020년 사상자는 12만 명으로서 2018년에 비해 30% 감소했는데, 아시아대양주와 중동 및 북아프리카에서 분쟁이 감소한 데 기인한다. 이 보고서는 분쟁을 사망자 수로 분류하는데, 1만 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분쟁으로 두 개의 내전(아프가니스탄과 예멘)을 꼽고 있고, 1천 명-9,999명이 사망한 고강도분쟁은 16개 사례를 들고 있다. 또 2020년 평화 프로세스가 진행되었지만 난항과 도전에 직면하였다고 보는데,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평화협상은 결국 미군 철수와 탈레반 집권으로 귀결되었다. 리비아와 시리아에서 정전이 제안되어 협상이 진행 중이다. 러시아가 중재한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일단 포성이 멈췄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유일하게 수단에서 평화 프로세스가 진척을 보이고 있다. SIPRI YEAR 2021은 코로나19 사태가 국제분쟁에 미친 영향을 간략히 언급하고 있는데, 그 영향이 단순하지 않다고 보았다. 일부 분쟁이 일시적으로 중단된 곳도 있지만, 폭력의 강도가 유지되거나 증가한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다만, 국제 평화유지활동(PKO)에 코로나19의 영향이 일정하게 작용했다고 평가한다. 평화유지활동은 전 세계에서 62곳에서 진행되었는데 적대행위로 인한 사상자는 줄어들었지만, 코로나19로 인한 일반 사망자는 늘어났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는 세계 무기거래 추세를 5년 단위로 분석해왔다. SIPRI YEAR 2021은 2016-20년 세계 무기거래량이 2011-15년과 거의 비슷하고 그 수준은 냉전 해체 이후 최고치를 유지하고 있다고 평가한다.(그림1) 물론 이 수치는 냉전이 격화하던 1981-85년 거래량보다 35% 낮은 것이다. 무기거래 규모에 코로나19와 경제침체가 미친 영향은 미미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6-20년 최대의 무기 수출국은 미국으로 수출량의 37%를 차지했고, 최대 수입국은 사우디아라비아로 수입 규모의 11%를 차지한다. 한국은 무기 수출국 9위, 수입국 7위를 기록하고 있다. 한편, 핵무기는 2021년 세계에서 9개국이 약 13,080개를 보유하고 있고, 그중 3825개는 실전 배치되었고, 그 중 약 2천 개는 고도의 작전경계 상태에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냉전이 해체되던 1991년 1월 미국과 소련이 보유한 핵탄두가 약 23,000기였던 것에 비해 최근 핵무기 보유 규모는 대폭 감소했지만, 핵보유국은 4개국이 늘어났다. 북한을 포함한 늘어난 핵보유국들이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라는 점에서 핵확산의 위험은 줄어들지 않고 있다.   그림1. 세계 무기거래 추세(1950~2020년)  * 출처: SIPRI, SIPRI Yearbook 2021 (Summaries, English version), p. 14.    위 사실들로 볼 때 소극적 평화의 관점에서 오늘날 지구촌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물론 1980년대 전반기와 같은 군사적 긴장, 국가 간 전쟁은 크게 감소하였다. 그럼에도 고질적 분쟁 추세, 무기거래, 그리고 핵확산 동향 등을 고려할 때 만족스럽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의 다수의 고질적 분쟁은 정치, 경제, 역사적인 이유들이 작용하고 있어 소극적 평화의 관점에만 평화를 다루기 어려움을 암시한다. 또 무기거래 규모의 증대와 핵확산 위험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현상적으로 소극적 평화의 문제로 보이는 것도 다른 요소들-민주주의, 발전, 화해, 공존, 다문화 등-이 작용함을 알 수 있는데, 평화를 깊고 넓게 생각한다면 구조적·문화적 평화를 함께 다루어야 함을 암시한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의 세계화와 장기화 추세를 고려할 때 평화를 분쟁집단들 사이의 전쟁 부재의 상태로 한정해온 통념에 한계가 드러난다. 소극적 평화가 그 이상의 평화를 추구하는 전제이자 출발인 점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평화를 그렇게만 규정한다면 평화의 궁극적 지향에 소홀하고 전쟁 부재 상태를 만들기 위해 물리력 확충을 정당화하는 모순에 빠질 수 있다. 군비경쟁의 안보 딜레마가 그것이다. 평화가 각양의 폭력을 예방·중단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을 말한다면 평화가 지양하는 폭력의 양상을 유연하고 다양하게 인식할 필요가 크다. 오늘날 겪고 있는 보건·기후위기 등 소위 인간안보(human security) 위협에 맞서는 노력은 평화 개념의 확장을 동반한다. 안토니오 구테레스(Antonio Guterres) 유엔 사무총장은 코로나19가 어렵게 달성한 발전과 평화구축의 성과를 위협할 뿐만 아니라, “분쟁을 악화시키고 새로 조장할 위험”을 지적했다. 구테레스 총장은 2020년 8월 한 회의에서 “지속가능한 평화 개념은 필수적으로 적극적 평화에 관하 것으로서, 이는 단순히 전쟁 종식과 다른 개념이다. 달리 말해, 그 개념은 국제사회가 총을 내린 상태를 넘어 대중이 보호받고 대표되는 상황까지 이른 나라를 포함한다”고 말했다. 여기서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평화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한정된 문제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상을 배경 지식으로 삼아 코로나19 사태가 인류의 삶에 주는 영향을 살펴보자.   2) 코로나19의 전방위 충격 코로나19 사태가 국제사회에 미친 충격을 인권의 시각에서 알아보자. 코로나19 사태가 진행된 지 1년이 지나는 시점에서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가 제출한 보고서는 코로나19의 충격이 건강, 생활, 교육 등 대중의 전반에 걸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고 말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1월 1일 현재 81백만 명 이상이 코로나19에 확진(1.8백만 명 사망)되었다. 혼란에 빠진 공공보건체계로 인해 여성을 포함한 대중의 신체적, 정신적인 피해가 큰데 코로나19에 대한 보건체계에 대한 접근이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 이전에도 정신건강 증진, 예방 및 의료 등에 대한 투자 부족으로 팬데믹이 초래한 정신건강에 대한 대응이 부적절했다. 공공보건의료에 대한 접근 부족으로 재정 형편이 부족한 대중의 치료 기회가 축소됨으로써 감염률이 높아졌다. 위 보고서는 또 코로나19와 부대 경제적 위기로 88백만 명에서 1억 15백만 명이 극심한 가난에 처해졌다고 말한다. 또 2020년 4-6월 사이 4억 95백만 개의 정규직업이 없어졌고, 전 세계 노동자의 절반이 직장을 잃을 위기에 빠졌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는 2020년에 코로나19 팬데믹으로 2019년 약 6억 9천만명의 영양부족 인구에 83백만~1억 32백만 명을 추가했다고 밝혔다. 낙후한 주거환경과 생활조건으로 감염 위기와 바이러스 확산을 증가시켜 전 세계 약 18억 명의 인구가 집을 잃고 부적절한 주거환경에 처해졌다. 30억여 명이 가정에서 식수 및 비누 이용이 미흡해 기본적인 위생문제를 초래했다. 또 약 10억 명 이상의 비공식 정착지에 있는 대중은 생활환경이 특히 열악하다. 그 결과 그런 대중이 코로나19로부터 보호할 능력은 심각하게 열악하다. 전 세계 인구의 71%의 인구(아동의 2/3 포함)는 사회보장을 적용받지 못하거나 부분적으로만 보호받고 있다. 비공식경제에 종사하는 여성들도 사회보장에 취약하다. 190여 국가에서 대규모 학교 폐쇄로 16억 명의 학생들이 영향을 받았다. 인터넷을 포함한 양질의 가정교육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이 받는 충격은 인생에 영향을 줄 정도이다. 많은 아동들은 팬데믹이 초래한 교육 격차를 줄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코로나19 확산을 통제하려는 국가 대책이 인권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뚜렷하다. 이동의 자유에 관한 봉쇄 및 제한 조치로 노인과 장애인 등 취약계층을 고립시킬 위험이 높아졌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젠더에 기반한 폭력이 봉쇄조치로 증가한다는 보고도 있다. 한편, 유엔개발프로그램(UNDP) 등 관련 기구는 위와 같은 코로나19의 광범위한 충격을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가난, 영양, 건강, 교육, 물과 위생시설에의 접근 등 7개 영역에 걸쳐 ① 코로나 없는 상황, ② 최악의 손실, ③ 지속가능발전목표(SGD) 적극 추진 등과 같은 시나리오를 설정해 코로나19의 충격을 비교 분석하였다. 코로나19가 가한 충격에 대해 보고서는 코로나 없는 상황에 비해 2030년 안에 48백만 명이 더 가난해지고, SDG 목표1(가난 퇴치)을 달성할 나라는 3개국을 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됐다. 또 12백만 명이 더 영양실조에 빠지고, 산모, 신생아, 아동 사망률은 줄어드는 대신 교육, 물과 위생 접근이 위축된다. 2030년 213백만 명이 코로나 없는 시나리오보다 더 가난에 처할 것이라고 한다. 코로나19의 이런 충격이 국가 내에서, 그리고 국가 간에 격차가 존재하는 것도 문제이다. 위 인권최고대표사무소의 보고서는 국가 내 집단 간 격차를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보고서는 코로나19의 충격이 고르지 않고, 취약집단에 더 큰 충격을 가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아동, 원주민과 소수민족, 성소수자, 죄수, 장애인, 이동 중인 사람, 노령자, 여성 및 소녀 등이다. 예를 들어 팬데믹이 국내 실향민은 물론 이주민, 난민, 피난민에 미친 영향은 대단하다. 국경 봉쇄로 수백만 명의 이주민들과 고국으로 되돌아가려는 사람들이 방황하고 있다. 이동 중인 대중은 식수와 위생, 거처 혹은 충분한 영양 등 기본적인 서비스에 대한 접근에 취약하다. 또 여성은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될 위기에 다른 집단보다 더 많이 노출당해 있다. 88%의 개인 돌봄 노동자와 69%의 의료종사자들이 여성이다. 코로나19의 충격이 국가 간에 차이가 있는 점은 방역과 백신 접종 기회에서의 격차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최근 보고에 따르면 67개국에서 90%의 인구가 코로나19 백신에 대한 접근이 불가능했는데, 그에 비해 부자 나라에서는 2021년 말까지 세 번에 걸친 백신 접종이 이루어질 전망이다. WHO는 올 연말까지 세계 각국이 전체 인구의 40%가 코로나 백신 접종을 완료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아프리카에서는 전 세계에서 접종된 코로나 백신 접종의 2%에 불과한 수준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관련 국제기구와 일부 국가에서 노력하고 있지만 ‘백신 국가주의’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그래서 코로나19가 인간발전지수(HDI)가 중하위로 평가되는 국가들에 미친 영향이 주목을 끈다. 2020년 인간발전지수는 평가를 시작한 지 30년 만에 처음으로 “가파르고 전례 없는 하락”을 보였다. 인간발전보고국의 2020년 분석에 따르면, 팬데믹이 초래한 학교 폐쇄 혹은 효과적이 않은 거리두기 학습으로 중하위 인간발전국가들에서 보통교육에서 학교수업 중단 비율은 86%(하위국가), 74%(중위국가)로, 이는 고위국가들에서의 20%에 비해 훨씬 높다. 2030년까지 중하위 국가에서 극심한 빈곤에 처한 대중은 626백만 명(코로나 영향 지속시) 또는 753백만 명(최악의 시나리오시)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됐다. 2030년까지 가난에 처한 대중의 86%가 중하위 국가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79%의 대중은 최악의 시나리오에 직면할 것이다. 41백만 명에서 169백만 명은 코로나 영향 지속시와 최악의 시나리오시에 직접 가난에 직면할 것이고, 그 중 20백만~83백만 명은 여성과 소녀들이다. 2030년까지 코로나19 사태로 영양실조에 직면할 인구는 코로나19의 영향이 없는 경우와 비교해 12.8백만 명으로 증가할 수있다.(그림2) 결국 코로나19 사태는 기존의 불평등 추세를 촉진하고 가장 취약한 계층이 겪는 곤경을 악화시켜왔다. 국가 내 불평등은 물론 코로나19로 국가 간 불평등도 커질 것이다. 코로나19 사태가 예측할 수 없어 그 사회경제적 충격을 완전히 파악하는 데 수년이 더 걸릴 것으로 이 보고는 예측한다.   그림2. 인간발전지수 중하위 국가의 극빈층 비율  * 출처: B. Abodoye et al, “Leaving No One Behind: Impact of COVID-19 on the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SDGs),” UNDP and Frederick S. Pardee Center for International Futures (2021) p. 8.    식량 위기와 관련해 세계식량계획(WFP)과 세계농업기구(FAO)는 23개 국가 혹은 상황에서 심각한 식량 불안이 2021년 8-11월 사이에 더 악화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들 국가는 대부분 아프리카와 중동, 서남아시아와 카리브해에 위치한 중저위국들이다. 이들 23개 사례에서 생명과 삶을 구조하기 위한 표적화된 인도주의적 행동이 긴급하게 요청된다. 그중 5개 사례는 기아와 사망 예방을 위해 대단히 중요하다고 평가됐다.   지구촌의 복합 대응 1) 기후·보건위기의 안보리 습격 코로나19 사태의 충격이 사상 유례가 없고 그 종식이 아직 기약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인류는 혼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인류는 지혜와 경험을 모아 대응을 시작하고 있다. 코로나19에 맞서는 지구촌의 대응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국제사회의 분쟁 종식 합의와 평화 인식의 확대이다. 코로나19 사태의 세계적인 대처를 위해 2020년 7월 1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국제 분쟁집단을 향해 분쟁 종식을 촉구하는 결의 2532호를 채택하였다. 안보리의 이 결의는 보건위기가 국제 평화 및 안보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안보와 평화 개념의 확장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이어 안보리는 2021년 2월 26일에도 전 세계 모든 분쟁 당사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인도주의에 기여하는 분쟁종식”을 촉구하는 결의 2286호를 통과시켰다. 안보리는 이 결의로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원활하게 전개되길 기대하였다. 결의 2286호를 환영하면서 테로스 게브레이수스(Tedros A. Ghebreyesus) 세계보건기구 국장은 백신 생산을 늘리기 위해 관련 지적재산권 포기를 촉구했다. 그는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인질로 잡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 바이러스의 조기 퇴치를 위해서는 “유엔 안보리가 정치적 의지가 있다면 그것(백신에 대한 지적재산권 포기: 필자 주)를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보건위기와 함께 기후위기도 안보리의 의제로 부상하였다. 2019년 1월 25일 안보리는 기후위기가 평화안보에 미치는 영향과 그 대책을 논의하는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 70여개 국가들에서 고위 정치인들과 과학자들이 참여했다. 그 자리에서 로즈마리 디카를로(Rosemary DiCarlo) 정치‧평화 담당 유엔 사무차장은 “기후 관련 위기와 평화의 관계는 복잡하고 종종 정치, 사회, 경제, 그리고 지형적 요소들과 상호 작용한다”고 말했다. 2015년 파리기후협정 이행 방안에 동의한 지 2개월 후 197개국에서 모인 이 자리에서 기후변화는 ‘복합 위협’으로 규정되었다. 세계은행은 기후변화에 즉각 대응하지 않으면 해수면 상승, 물 부족, 농작물 생산성 저하 등으로 2050년까지 2억 1,600만 명의 사람들이 이주를 강제당할 것이라고 경고할 정도이다. 이런 위험 징후와 경고를 감지하고 유엔 안보리는 새 천년 들어 기후변화를 국제안보문제로 다루기 시작했다. 그 중 최근의 한 예로 2017년 3월에는 기후 관련 위기를 다뤄 아프리카 차드호 유역에서의 분쟁 해결을 촉구하는 결의 2349를 채택하기도 했다. 그 자리에는 아킴 스타이너(Achim Steiner) UNDP 행정관, 파블 캐뱃(Pavel Kabat) 세계기상기구(WMO) 수석과학자, 그리고 청년대표로 린제이 겟첼(Lindsay Getschel) 환경안보 연구원이 참석해 기후위기 징후들이 국가 및 국제안보 위협임을 강조하고 그 해결책으로 재생에너지 사용 확대를 비롯한 기후 적응 및 위기 감소에 투자할 것을 내놓았다. 기후·보건위기의 동반 부상으로 지구촌의 존립이 위태롭게 되면서 이들 문제들이 안보리의 테이블에 오르는 것은 자연스럽고,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구테레스 유엔 사무총장은 2020년 8월 한 회의에서 안보리의 국제분쟁 종식 촉구 결의를 평가하면서도, 40여 건 이상의 선거 연기를 지적하면서 코로나19가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포용(inclusion)이 인도주의와 발전 문제 대응, 특히 공동체와 소외집단에 “대단히 중요하다”고 지적하면서,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신뢰를 다시 만들고 사회적 결속을 증진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쿠테레스 사무총장은 인도주의, 발전, 그리고 평화 행위자들에 걸쳐 지속하는 평화는 통합되고 일관된 접근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유엔 안보리의 분쟁 중단 결의로 대부분의 분쟁이 중단된 것은 고무할 만한 일이다. 이 결의를 계속해서 준수하고 분쟁 요인들을 대화와 협상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노력을 계속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유엔과 지역기구, 그리고 유관 국가들의 중재 및 촉진 역할이 더욱 요청된다. 필요시 분쟁지역에 적절한 방식의 평화유지활동을 전개하고 분쟁 당사자 집단의 협상을 격려하는 방안을 적극 개발할 바이다. 그러나 전쟁 중단과 분쟁의 평화적 해결 노력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평화를 달성하는 평화적 수단이다. 모든 역량을 투입해 코로나19를 퇴치하고 모두가 안전하고 평온한 세계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목적과 수단 양 측면에서 평화의 확장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그러면 코로나19의 충격이 말하는 깊은 메시지는 무엇인가? 2020년 9월 유엔 총회에서는 유엔 체계와 관련 지역 및 국제 조직과 금융기구들이 협력해 코로나19가 초래한 사회, 경제, 인도주의, 재정적 충격에 적절하고 비차별적인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결의(A/RES/74/307)를 채택한 바 있다. 이 결의에는 단기적, 구조적 대응과 일국적, 국제적 대응, 그리고 취약계층 보호 등을 다루고 있는데, 그 구체적인 대응 방안이 앞에서 언급한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의 2021년 1월 보고서이다. 아래는 그 보고서를 통해 국제사회가 코로나19에 대응하는 현 상황을 조감해볼 수 있다.   2)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넘어 국제사회가 코로나19에 대응하는 방향은 크게 넷이다. 하나는 불평등 및 차별에의 대응이다. 취약계층이 코로나19로 사망 가능성이 더욱 높고 사회경제적 타격을 가장 심하게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이 겪는 충격을 완화하는데 집중하는 것이다. 이는 도덕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실용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과제인데 현재 그렇게 진행되는지는 의문이다. 둘째는 정보의 자유로운 흐름과 대중의 안전하고 포용적이고 효과적인 참여이다. 팬데믹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고 더 나은 회복은 모든 사람들이 대책활동에 참여하느냐에 달려있다. 여기에 효율을 선호하고 비민주적 의사결정을 해온 관행이 이를 제약할 수 있다. 특히, 언론인, 인권옹호자, 의료종사자들이 자유롭게 발언할 공간을 보장하는 것이 코로나19 대응에 관건이다. 세 번째 방향은 새로운 사회계약 실행과 경제 전환이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는 정부, 대중, 시민사회, 사적 영역, 국제금융기구 등이 새 사회계약을 맺어 동등한 권리와 기회에 기반해 고용, 지속가능한 발전, 보편적 의료체계, 사회보호를 보장할 것을 권고한다. 이와 관련해 최우선 과제는 보편적이고 강력한 건강체계 발전, 모든 계층이 양질의 교육에 접근하는 것이다. 아직 코로나 대응에 전력하는 나머지 이런 구조적 전환은 서서히 일어날 것이다. 네번째 방향이 세계적 대응이다. 팬데믹 사태는 상호연관된 오늘날의 세계와 우리 각자의 안전과 안보가 모두의 안전과 안보에 의존하는 정도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더 강하고 더 회복가능한 미래를 향한 길은 새로운 수준의 세계 협력과 국제 연대를 필요로 한다. 각종 이기주의와 배타주의는 그것을 추구하는 집단의 생존을 보장하지 않고 지구촌의 모든 존재와 지구의 공멸을 촉진할 뿐임을 인식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면 코로나19 백신을 세계적 공공재로 다루어 백신 분배를 골고루 한다면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백신 접종이 불가능한 목표는 아닐 것이다. 이상과 같은 코로나 대응은 여전히 인간의 생존에 초점을 두고 인간과 인간의 관계 개선을 대안으로 삼고 있다. 과연 지구촌의 위기를 이렇게 인식하고 접근하면 평화로운 지구를 만들어갈 수 있는가? 여기서 기후위기와 보건위기가 어떻게 발생하고 이제는 통제불가능해 보이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최근 매우 흥미롭지만 우울한 보고서가 주목을 받고 있다. 2020~21년 전 세계 각지에서 발생한 10개의 재난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유엔대학 등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이 기온 상승을 전례 없이 높여놓았다. 한 곳의 재난이 다른 곳의 재난과 연관성이 뚜렷하고 그 범위가 광범위하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코로나19의 세계적 유행, 미국 텍사스주의 때아닌 추위, 아마존 숲 5백만 에이커를 파괴한 화재, 그리고 9개의 폭우가 7주 간 연속해서 발생한 베트남이 서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 재난은 각각 수천 마일 떨어져 발생했지만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 예를 들어 북극지방의 기후 상승으로 극소용돌이가 파괴돼 찬 공기가 남쪽으로 내려가 텍사스주에 찬 공기가 엄습해 전력망이 얼어붙고 210명이 사망했다. 또 다른 우울한 예는 코로나19와 사이클론의 연관성이다. 사이클론 암판이 인도와 방글라데시를 덮쳤는데, 피해 지역 주민의 50% 이상이 빈민층이었다. 코로나19의 발생과 그에 따른 봉쇄조치로 이주노동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파괴된 집으로 되돌아갔는데, 곧장 이들은 격리상태에 처해졌다. 주민들은 사회적 거리두기, 위생 그리고 사생활을 걱정하며 불안정한 곳에서 폭풍을 견뎌내기로 했는데, 곧이어 코로나19에 직면한 것이다. 주민들 가운데 사이클론으로 100명이 목숨을 잃었고 490만여 명이 집을 잃었고 130억 달러의 피해를 보았다. 이 보고서는 일련의 재난 사건들의 근본 원인도 거론하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유발한 온실가스 배출, 불충분한 재난위기 관리, 환경문제의 영향을 저평가해온 정책결정 관행 사이의 상호연관성이다. 인간이 유발한 온실가스 배출은 텍사스주가 경험한 때아닌 추위의 원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 반대편의 사이클론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불충분한 재난위기 관리도 텍사스주가 경험한 많은 인명 손실과 인프라 피해, 그리고 베트남 중부지역의 홍수로 초래한 많은 손실에 영향을 미쳤다. 아마존의 산림 파괴는 인간의 세계적인 육류 수요와 연관이 있는데, 이는 동물 사육을 위한 콩 재배지의 증가를 동반하였다. 그 결과 아마존의 숲이 더 많이 파괴되는 것이다. “우리가 세계에서 목도하고 있는 재난은 상상 이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 재난들은 개인의 행동과도 연관되어 있다.”고 이 연구에 참여한 유엔대학 잭 오코너(Jack O'Connor) 박사가 평가했다. 기후·보건위기가 겹쳐 명확해진 지구촌의 실존적 위기는 인간과 세계를 운명공동체와 같이 상호의존적으로 묶어내고 있다. 그래서 발상의 전환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필연적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 변화만이 아니라 인간과 세계, 특히 생태계와의 관계 전환이 있어야 함을 위와 같은 복합 재난이 말해주고 있다. 인류는 새천년 들어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MDG, SDG)를 설정하고 노력하고 있지만, 코로나19가 없는 상황이라도 세계는 SDG 2020년 목표치를 달성하기 어렵다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거기에 코로나19 사태는 세계경제 위축을 초래함으로써 SDG 목표 달성에 상당한 도전을 추가하고 있다.(그림3) 심지어는 SDG를 적극 추진하는 시나리오조차도 우리가 원하는 세계를 완전하고 보편적으로 달성하는 것을 약속할 수 없다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그림3. 시나리오별 SDG 목표 달성 가능치(2030)  * 출처: Hughes et al., “Pursuing the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in a World Reshaped by COVID-19,” p. 9.    동질이형의 평화 위와 같은 우울한 전망 속에서 세계평화의 길은 실종되어 버리는가? 기존의 평화관은 사라지고 대안적 평화관은 감도 잡기 어려워지는가? 코로나19 극복 이전에 다른 모든 것은 뒤로 미뤄놓을 수밖에 없는가? 여기서 평화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 세계적인 기후·보건위기는 인류의 삶은 물론 소극적 평화에 익숙한 기존의 평화 인식에도 큰 충격을 주고 있다. 표현 때문에 오해를 줄 수도 있겠으나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는 경중과 우열의 관계가 아니다. 서로 의존하고 강화하는 관계이다. 소극적 평화 없이 적극적 평화가 가능할까? 내전이 계속되고 있는 예멘과 시리아 등지에서는 코로나19 대응은 물론 식량, 물과 위생, 치료 등 생존의 필수조건들에 접근하기조차 어렵다. 또 적극적 평화를 무시하는 소극적 평화는 기만적이다. 평화를 위해 인권과 민주주의를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괴변에 불과하다. 현재 아프가니스탄과 미얀마 집권세력은 이런 비난에 직면해있다. 이렇게 차이나 보이는 사례들에서 보이는 공통점은 평화들 사이의 불가분성을 무시한 채 평화를 권력의 수단으로 다루는 행태이다. 지구촌의 실존적 위기는 인류 전체의 대오각성과 공동 대응을 요청한다. 그 전제는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며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통전적인 시각(holistic perspective)이다. 인간이 자신과 다른 집단-학연·지연·계층·직급 등으로 구별되는 집단, 다른 민족, 국가, 인종 등-과 조화를 이루며 공존할 수 있는지는 단정하기 어려운 논쟁적인 주제이다. 그럼에도 전쟁을 비롯한 물리적 폭력의 종식을 힘의 억제나 균형에만 의존한다면 그것은 일시적인 효과에 그친다는 사실이 뚜렷해지고 있다. 억압과 차별, 불평등과 혐오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해 온 구조적·문화적 폭력의 종식에서만 평화가 온전하게 도래한다. 요컨대 소극적 평화는 적극적 평화에 의해서만 확실하게 보장될 수 있다. 그렇게 하려면 인간사회 내 다양한 집단과 가치들 사이의 상호 존중과 협력 외에 묘안이 없다. 그런 움직임은 세계를 서로 연결된 하나의 총체로 바라보는 시각에 의해 지지받는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권력과 지배의 시각에서 인정와 공존의 시각으로 전환하지 않는 한 전쟁과 그 수많은 원인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코로나19의 세계적 유행으로 분쟁이 일시 중단된 것은 고무적이지만, 만약 코로나19가 진정되고 다시 분쟁이 격화된다면 인류는 마지막 생존의 기회를 스스로 버리는 셈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분쟁을 중단한 터에 (핵)무기를 보습으로, 적대에서 공존으로 전환해버리면(!) 좋을 것이다. 이것을 규범이나 용기로 요구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인류와 그 터전의 생존을 위한 최후의 필수적인 선택인 것이다. 그럴 경우 지구촌의 실존적 위기는 일부 개선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 개선으로 만든 평화라는 점에서 성과이지만, 같은 이유로 이 실존적 위기를 해소하는 수준은 아니라는 점에서 불충분한 평화이다. 이런 불만스러운 전망은 무엇이 문제인가, 그것이 평화 논의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여기까지 와서도 지구촌의 위기가 실존적 차원이라는 인식에 공감하지 못하다면, 앞에서 말한 2020~21년 복합 재난이 지구촌의 생존을 위협하는 전조라는 평가에 귀 기울이면 좋을 것이다. 2021년 세계 기상이변은 산업화 이전 대비 1.09도 상승한 기온에서 발생했다. 그런데 과학계가 지구 생존의 분수령이 될 산업화 이전 대비 1.5도 상승할 가능성이 20년 안으로 더 가까워졌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렇게 기온이 상승할 때 발생할 기상변화는 인간의 손을 넘어 지구촌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것이다.(그림4) 그때는 전쟁할 조건과 의지가 사라질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평화를 인간과 인간의 관계 전환으로 접근하는 기존 관행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음을 말해준다. 생태위기가 주도하는 지구촌의 실존적 위기 시대에 말이다.   그림4.  * 출처: 『한겨레』, 2021년 8월 9일.  그럼 그런 위기의 심연에서 기회의 빛을 볼 수 있을까? 아니 그에 앞서 생존의 빛을 볼 길을 인류는 알고 있는가? 그것은 복합적이고 무서운 재난의 사슬 사이에 있는 건 아닐까? 오코너 박사는 대담하게도 문제가 상호연관되어 있다면 그 해결책도 그럴 것이라고 단서를 잡는다. 그는 온실가스 배출 감축은 다양한 재난의 영향을 감소시키고, 재난의 빈도와 심각성을 완화시키고, 생물 다양성과 생태계를 보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상기할 바는 결자해지(結者解之) 아닐까? 오코너 박사의 제안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왜곡한 측에서 먼저 행동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생태계를 파괴해온 인간이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는 것이 인간과 자연의 관계 회복을 통해 조화롭고 지속가능한 삶을 형성하는 출발이다. 성장 및 소비 지상주의, 그것을 영원히 추구하기 위한 경쟁과 지배의 패러다임은 그 스스로 만들어낸 결과에 의해 부정당하는 셈이다. 인류 삶의 터전이 존립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MDG, SDG 같은 거대 프로젝트도 인간와 세계의 관계 전환을 중심으로 재조정할 필요가 크다. 복합 재난의 극복을 위해 인간이 유발한 온실가스 배출 완화가 출발점이라고 해도 그 방법에 국제사회가 동감하고 동참하지 않으면 허망한 일이다. 숲 복원과 토양 중성화가 그 주요 방법이다. 일종의 “자연에 기반한 인간발전”의 길이다. 그 방법은 지구적으로는 동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해당 국가와 이해당사자 집단이 반대할 수 있다. 온실가스 배출로 많은 이익을 보았거나 기대하는 집단들(국가 포함)은 권력이 많은 반면, 원주민과 지역사회는 그렇지 않다. 자연친화적인 발전으로 나아가도록 규제와 인센티브를 동시에 고안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의 지구촌이 이대로는 존립할 수 없고 대전환에 나서야 한다는 절박한 현실의식을 공유하는 일이다. 그 밑바탕에는 인간과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인간은 세계의 (지배자가 아니라) 일부에 불과하다는 세계관이 자리하고 있다. 오늘날 인류의 삶이 위험사회에서 위험세계로 악화되어 버린 상황에 부응하여 삶의 목표와 방식을 전환시켜야 한다. 35년여 전 맥페이그 교수가 직면한 세계가 개선되기는커녕 더 악화되었다. 그녀가 말한 세 가지 하나님 모델은 지구촌의 실존적 위기 시대에 더 알맞고 더 절실하다. 지구를 어머니로, 지구를 구성하는 인간 외 다른 생명을 연인과 친구로 대하면 어떨까! 지구촌의 실존적 위기 상황에서 평화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인간과 세계의 관계를 적극 끌어안고 그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평화 인식도 인간 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다뤄온 관행에서 벗어날 때이다. 인간과 세계의 관계, 세계 속에서 인간의 위상과 역할이 평화의 주요 관심사로 들어서는 것이다. 오늘날 평화는 그 대상과 관심사가 확대되어 그 유형이 다양해지는 양상인데, 그럼에도 그 자세(이해와 공존)와 접근방법(대화와 협력)에는 변함이 없다. 평화도 존재 조건의 변화에 부응하고 변화할 때 그 존재의의를 재발견할 수 있다. 지구촌의 실존적 위기 시대에 평화는 전쟁 부재를 전제로 조화로운 관계 맺기로 재정의할 수 있다. 한반도는 자체의 평화 프로세스를 전개해나가면서 이상과 같은 지구촌의 실존적 위기 극복에 동참해 나가야 할 입장이다.이 글에 포함된 의견은 저자 개인의 견해로 제주평화연구원의 공식입장과는 무관합니다.저자소개 통일연구원 연구위원. 외교부 자문위원, 통일부 남북회담본부 자문위원. 최근 저작으로 『한국 평화학의 탐구』, 『12개 렌즈로 보는 남북관계』, 『분쟁의 평화적 전환과 한반도』 등이 있다.
  • [평화담론] 방공식별구역 이슈와 동아시아 평화
    저자
    서보혁(통일연구원 연구위원)
    발간호
    2021-02
    동아시아 국가 간 상당한 수준의 경제적 상호의존과 해소되지 않는 역내 정치·안보적 경쟁구조의 기묘한 공존은 흔히 ‘동아시아 패러독스’ 라 불린다. 사실, 이 용어만큼 협력과 갈등이 교차하는 동아시아 지역질서의 특징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상하는 용어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Goldstein and Mansfiled 2012). 문제는 최근 동아시아 질서는 협력의 축이 약화하는 반면,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중·일 3국의 역내 교역 비중은 1990년 12.3%에서 2011년 21.3%로 확대되는 경향을 보이다가 최근 다시 둔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중국의 역외무역 증가, 사드 배치 이후 중국의 보복조치 및 한국의 대중 헤징전략, 일본의 대한(對韓) 수출규제, 미·중 간 전략적 경쟁의 심화와 경제블록화 현상 등 정치적 갈등의 영향 때문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이처럼 최근 동아시아 역내관계는 정치·안보적 갈등이 경제·사회적 협력마저 위협하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혹자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정치·안보적 갈등이 전면전의 양상으로 번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위기 안정성(crisis stability)’ 이 존재한다고 보기도 한다 (Choi 2016). 동북아 삼국의 군사력은 일국의 기습공격에 대해 충분한 보복을 단행할 수 있을 정도로 비교적 균등한 상황이며, 이러한 긴장 상황에 대한 인지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위기가 격화되지 않는 억제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보다 구조론적 설명으로는 역외국가인 미국이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한국과 일본에 주둔군과 전략자산을 배치하고, 중국의 공세적 군사전략과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막는 ‘이중의 억제(dual containment)’에 초점을 맞추는 접근이 있다. 즉, 미국은 ‘바퀴축과 바퀴살 (hub-and-spoke)’과 같이 한·일 양국의 공동의 동맹국으로서 중국의 잠재적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안보 공공재를 제공하고, 한일 양국 간에 비공식적 ‘준동맹(quasi-alliance)’과 유사한 안보협력 관계를 구축함으로써 갈등의 격화를 관리한다는 해석이다 (Ikenberry 2004). 문제의 소재는 이러한 군사적 상호억제에 기반한 안정성은 항구적인 것이 되기 힘들다는 데에 있다. ‘위기 안정성’ 이라는 형용모순에 가까운 용어가 표상하듯 군사적 상호억제에 의한 균형은 사실 여러 ‘촉발요인(triggering event)’에 의해 깨지기 쉬운 불안한 것이다. 배타적 동맹체제에 의해 나름 세력균형에 의한 불안정한 평화기를 유지하던 유럽에서 사라예보 사건이라는 촉발요인이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제1차 세계대전의 참화로 번진 과정은 이러한 불안정성을 잘 보여 준다. 현재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다양한 분쟁의 촉발요인이 존재한다.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한-일간 갈등, 센카쿠/다오위다오를 둘러싼 중-일 간 영토분쟁은 대표적 갈등요인으로 지적되어 왔다. 또한, 미·중 간 전략적 경쟁이 격화로 인해 구조적 안정성이 위협받는 현 정세에서 대만해협 및 남중국해 등에서 전개되는 미국의 ‘항행의 자유의 작전(FONOPS: Freedom of Navigation Operations)’과 이에 대한 중국의 대응은 구조적 변동과 연계된 위험성 있는 촉발요인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반길주 2021). 학술적·이론적 관심도가 그리 높지는 않으나, 잠재적 분쟁 격화의 속도면에서 예의 주시해야 하는 갈등요인으로는 ‘방공식별구역(ADIZ: Air Defense Identification Zone)’의 경쟁적 선언과 침범에 관한 문제를 들 수 있다. 방공식별구역 문제는 군용항공기의 항속 속도에 기인하는 분쟁 격화의 긴박성, 각국 안보에 대한 민감성, 미중경쟁과의 연관성, 한국 관여 정도의 직접성 등 요소를 고려하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잠재적 위험성을 가진 이슈이다.   방공식별구역의 정의와 쟁점, 그리고 관련 분쟁 방공식별구역은 “영공방위 및 항공기 식별을 목적으로 통상 영공 외곽 지역에 일방적으로 설정된 공중구역”을 의미한다. 방공식별구역에 진입하는 외국 국적의 항공기는 관계 당국에 사전에 비행계획서의 제출이 요구되며, 비행 중 쌍방교신 유지의 의무를 지닌다. 방공식별구역은 비행정보구역(FIR: Flight Information Region), 작전구역(AO: Areas of Operations), 비행금지구역(NFL: No-fly Zone)등의 개념과 구분되는데, 우선 비행정보구역은 항공기구(ICAO)에서 분할ㆍ설정한 공역으로, 비행 중에 있는 항공기에 안전하고 효율적인 운항에 필요한 각종 정보를 제공하고, 항공기 사고의 발생 시 수색 및 구조업무를 책임지고 제공할 목적으로 구획된 영역을 의미한다. 즉, 설정 주체가 국제기구인 ICAO라는 점, 그 목적이 단순 항공교통의 안전 담보라는 점에서 방공식별구역과 구별된다. 작전구역은 평시 아군의 해상 및 공중 전력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합참의장이 설정한 구역을 의미하며, 방공식별구역과 달리 대외적으로 공표되지 않으며, 적용 대상도 자국군 구성원 및 전력에 국한된다. 비행금지구역은 안보적 목적으로 항공기의 비행을 불허하는 지역으로 공중에서의 비무장지대와 같은 성격을 지니며, 침범 시 격추될 수 있다 (김한택 2015, 72-75). 방공식별구역의 역사적 연원은 냉전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미국이 점증하는 소련의 위협, 특히 고속 전폭기로부터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자국 영공의 바깥에 5개의 방공식별구역을 설정한 것이 그 시초이다. 현재 미국이 설정한 방공식별구역은 대서양, 태평양, 하와이, 괌 등 여러 지역을 포괄하며, 남 캘리포니아 지역에 설정된 방공식별구역의 경우 연안에서 400해리에 이르는 지역에까지 뻗어 있다. 미국의 관행을 좇아 상당수 국가가 자국의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하였는데, 한국, 영국, 중국, 일본 등 약 28개 국가가 이에 해당한다. 방공식별구역 설정을 가능 혹은 금지하는 명확한 국제법 규정은 없으며, 이를 선포한 여러 국가들의 관행 및 운용 세칙 역시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국가들은 통과 통행(in transit) 중인 항공기를 적용 대상으로 포함하는 반면, 이를 적용 대상에 제외하는 국가들도 있다. 다만, '국제민간항공조약(Convention on International Civil Aviation, 일명 시카고협약)' 제12조에 규정된 영공 및 공해상에서 설정되는 규칙에 대한 일반규정을 방공식별구역 설치의 근거로 삼기도 한다. 동 조항은 “각 체약국은 그 영역의 상공을 비행 또는 동 영역 내에서 작동하는 모든 항공기와 그 소재의 여하를 불문하고 그 국적표지를 게시하는 모든 항공기가 당해지에 시행되고 있는 항공기의 비행 또는 작동에 관한 법규와 규칙에 따르는 것을 보장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을 약속한다. 각 체약국은 이에 관한 자국의 규칙을 가능한 한 광범위하게 본 협약에 의하여 수시 설정되는 규칙에 일치하게 하는 것을 약속한다. 공해의 상공에서 시행되는 법규는 본 협약에 의하여 설정된 것으로 한다. 각 체약국은 적용되는 규칙에 위반한 모든 자의 소추를 보증하는 것을 약속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처럼 방공식별구역은 본질상 영토주권이 미치는 영공과 구별되며, 여러 국가가 안보 및 항행의 안전을 위해 일방적으로 선언한 임의의 영역에 불과하다. 만일 각 국가의 방공식별구역에 중첩이 없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권리·의무에 대한 다툼이 없으며, 각기 선포한 방공식별구역을 상호 존중하는 관행이 생성된다면 국제 항공질서의 안정적 운용에 기여 할 수 있는 하나의 관습법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이론상 가정에 불과하며, 여러 국가의 경쟁적 방공식별구역 선포 및 이에 대한 상이한 해석으로 인해 국가 간 안보불안이 심화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방공식별구역과 관련된 가장 오랜 법적 쟁점 중 하나는 통상 ‘배타적 경제수역(EEZ: Exclusive Economic Zone)’ 혹은 공해 상공에 설정되는 방공식별구역 내에서 타국 군용기의 정찰 활동이 허용되는가의 여부이다. 이미 냉전기 미·소 간에 이와 관련된 상당한 안보적 긴장이 있었는데, 1960년 7월, 바렌츠해(Barents Sea) 공해지역에서 정찰활동을 하던 RB-47H기가 소련의 미그-19기에 의해 격추된 사건이 대표적 예이다. 이 사건 약 두 달 전에 발생한 U-2 정찰기가 소련 영공에서 피격되어 미국 측이 별다른 법적 대응 논리를 마련하지 못한 반면, RB-47H기 격추 사건에서 미국은 소련 영해에서 30해리 이상 떨어진 공해의 상공에서 작전이 수행된 점과 설령 정찰활동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연안국이 이를 격추할 권리는 없음을 지적하고 소련의 공격에 대해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공해상의 자유항행 원칙을 더욱 강조한 영국의 경우 직접적 당사국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발 더 나아가 공해상에서 정찰 활동을 포함한 일체의 군사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권리는 모든 국가가 향유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Dutton 2009, 702). 1982년 유엔해양법협약(UNCLOS: United Nations Convention on the Laws of Sea)의 채택에 따라 관련 분쟁의 양상은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어 갔다. 동 협약에서 공해의 범위는 영해, 접속수역, 배타적 경제수역이 아닌 지역으로 보다 좁게 설정된 반면, 기존 배타적 경제수역에서 연안국의 일정한 경제적 권리를 제외한 공해 자유의 원칙은 그대로 고수되었기 때문이다. 동 협약 제56조는 배타적경제수역에서의 연안국의 권리 및 관할권 및 의무를 규정하고 있는데, (a) 해저의 상부수역, 해저 및 그 하층토의 생물이나 무생물등 천연자원의 탐사, 개발, 보존 및 관리를 목적으로하는 주권적 권리와 해수ㆍ해류 및 해풍을 이용한 에너지생산과 같은 이 수역의 경제적 개발과 탐사를 위한 그 밖의 활동에 관한 주권적 권리, (b) 이 협약의 관련규정에 규정된 (i) 인공섬, 시설 및 구조물의 설치와 사용, (ii) 해양과학조사, (iii) 해양환경의 보호와 보전에 관한 관할권, (c) 이 협약에 규정된 그 밖의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동 협약상 배타적 경제수역에서의 권리행사와 의무이행에 있어서, 연안국은 다른 국가의 권리와 의무를 적절히 고려하고, 이 협약의 규정에 따르는 방식으로 행동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김한택 2015). 동 협약은 동시에 타국 EEZ상에서 항행의 자유를 행사하는 회원국에 대해서는 원칙적 의무를 부과하고 있는데, “해양의 평화적 이용에 관하여 이 협약에 따른 권리행사와 의무이행에 있어서 당사국은 다른 국가의 영토보전 또는 정치적 독립에 해가 되거나 또는 국제연합헌장에 구현된 국제법의 원칙에 부합되지 아니하는 방식에 의한 무력의 위협이나 행사를 삼가야 한다.”고 규정하는 제301조가 그것이다. 유엔해양법상 연안국에 인정된 ‘배타적’ 경제권리는 해당 지역에 대한 안정적 접근의 중요성을 더욱 높이며, 기존 공해 지역에서 향유되는 항행의 자유와 관련된 일체의 권리를 수호하려는 해양국과 이해충돌 가능성을 높인 것도 사실이다. 1986년 3월에 발생한 미국과 리비아 사이의 교전은 이러한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데, 양국 간 갈등의 연원은 리비아가 일방적으로 시드라만(Gulf of Sidra)을 절대적 주권이 미치는 영해 및 영공을 선포한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을 위시한 여러 서방국가들은 당시 리비아가 설정한 영해·영공 범위가 과도한 것이라고 규탄하였으며, 리비아가 1981년 미 해군 소속 전투기가 자국 영공을 침범하였다는 이유로 공격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미국은 유엔해양법협약이 체결된 82년경부터 시드라만이 리비아의 배타적 경제수역에 해당할 수는 있으며, 따라서 리비아가 자원과 관련된 법의 제정 및 집행을 할 수는 있으나, 다른 국가는 그 상공에서 일체의 자유를 향유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이후, 미국은 이러한 법적 해석을 강제하기 위하여 1986년 3월 전함 및 세 척의 항모를 시드라만에 투입한 항행의 자유 작전을 감행하였다. 이에, 리비아가 미 전투기에 지대공 미사일을 발사하자, 미국이 공대지 및 지대지 미사일로 응사하면서 리비아 측 4척의 전함과 미사일 기지를 격침하였다 (Dutton 2009, 701). 탈냉전기에는 러시아 전투기·정찰기가 타국 EEZ 상공에서 활발한 군사활동을 전개하며, 안보적 긴장을 유발하고 있다. 2007년 7월, 노르웨이 영공에 매우 인접한 EEZ 상공에서 러시아 전폭기·정찰기 출격의 빈도 증가가 관찰되었고, 노르웨이 공군편대가 출격, 이를 저지하여 긴장이 형성된 적이 있었다. 러시아 측은 이것이 통상적 훈련의 일환이었다고 해명하였는데, 노르웨이는 미국-영국 등과 함께 EEZ 상공에서 군사 활동을 포함한 일체의 자유를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므로 러시아의 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9월에는 영국 영공에 접한 EEZ 상공에서 같은 방식의 비행이 관측되었고, 영국 공군이 대응하며 긴장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방공식별구역 문제는 단순히 안전 및 편의를 위한 국제관습 혹은 일국의 선언의 의미를 넘어 유엔해양법 체결 시 노정된 연안 국가군-해양 국가군 사이의 근본적 갈등의 연장 선상에 놓여 있다. 또한, 세계 여러 지역에 군사적 힘을 자유롭게 투사(military projection)하기 위해 EEZ 및 공해상에서 자유로운 군사활동 원칙을 고수함과 동시에 이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방공식별구역을 본토방위의 수단으로 활용하려는 미국의 군사전략과도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문제이다. 이러한 점에서 방공식별구역을 둘러싼 국가 간 갈등은 결코 법적문제만으로 치환될 수 없으며, 이를 힘의 행사 수단의 한 수단으로 접근하는 전략적·정치적 시각과 연동하여 이해될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방공식별 선포의 확장 및 쟁점 아래 <그림 1>과 같이, 현재 동아시아 지역 주요국은 각기 방공식별구역을 선포·운용하고 있으며, 상당지역이 중첩하여 갈등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방공식별구역의 기원은 6·25전쟁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미 태평양 공군은 1951년 3월 22일 한국, 일본, 필리핀 등 동맹국들을 혹시 있을지 모를 소련·중국 등의 영공 침범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방공식별구역을 설정하였으나, 6·25 전쟁 휴전 이후 그 설정 및 운용에 관한 권한을 각 국가에 이양한 바 있다. <그림 1. 동아시아 각국의 방공식별구역 현황> 출처: Mercedes Trent, "Over the Line: The Implications of China’s ADIZ Intrusions in Northeast Asia," Federation of American Scientists, 2020. p. 9.  동아시아 국가 간 방공식별구역과 관련한 뚜렷한 갈등은 2010년 이전에는 관측되지 않다가 2013년 11월 23일 중국의 일방적 방공식별구역 선언 및 주변국들의 대응에 따라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중국의 방공식별구역은 일본과 영유권 분쟁상황에 있는 센카쿠-다오위다오와 한국의 배타적 경제수역 내에 있는 이어도 해양과학 기지를 포함하는 것이어서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은 이를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은 50년대부터 일종의 군사경제수역, 군사항행수역, 군사작전수역 및 그 상공에서 비행제한을 실시하고는 있었으나, 이러한 영역은 대외적으로 명확히 공표된 것은 아니었다. 동중국해·남중국해 여러 도서를 둘러싸고 중국과 주변국 간 영유권 분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선포는 그 동기에 관한 여러 해석을 낳았다. 우선 주변국, 특히 일본의 센카쿠 열도 국유화 조치 직후 중일 간 갈등이 고조되는 과정에서 중국이 취한 대일 억제책(deterrence)라고 보는 해석이 있다. 이보다 중국의 공세성을 더 강조하는 견해는 센카쿠/다오위다오 영유권을 둘러싼 일본과의 경쟁에서 전략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로 보거나 '반(反)접근 · 지역거부 전략(A2/AD: Anti-access/Area Denial)’의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상기하였듯이 방공식별구역의 법적 성격은 영토 및 영해 영유권과 관련이 없다는 점, 방공식별구역 획정·선언 과정에서 인민 해방군과 외무성 간 뚜렷한 공조가 없었으며 방공식별구역의 집행 계획과 관련하여 비일관성을 보였다는 점, 시진핑 주석은 방공식별구역 선언 직후 오히려 주변국과의 우호적 관계를 강조하였다는 점 등을 고러하면 이러한 해석이 전적으로 설득력을 가지기는 어렵다 (Hsu and Hsu, 2017). 중국 내부 의사결정과정의 불투명성으로 인해 확정할 수는 없으나,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선포는 상기한 요인들과 더불어 미국이 전개하는 정찰활동이 야기하는 갈등을 예방하기 위한 동기가 복잡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보는 시각이 타당해 보인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연안국이 배타적 경제수역에서 타국의 군사활동에 일정 정도 제약을 가할 수 있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이러한 입장은 상기한 미국이 견지한 자유항행의 원칙 및 작전과 충돌하며, 상당한 갈등을 빚어온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갈등이 가장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이 미국의 EP-3 정찰기와 중국의 F-8 전투기가 2001년 4월 중국의 하이난섬 상공에서 충돌한 사건이다. 사건 직후, 미국은 배타적경제수역 상공에서 정찰기에 의한 정보수집활동은 합법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했고, 중국은 그러한 정찰활동은 유엔 해양법협약에 의해 인정되는 상공비행의 자유의 한계를 넘는 것이라며 미국을 비난하였다. 유엔해양법협약의 해석을 둘러싼 양국의 입장대립은 2001년 3월 황해에서 발생한 미군 해양조사건 바우디치(USNS Bowditch)호의 군사정보수집에 대한 갈등과 2009년 3월 남중국해에서 발생한 미군의 해양조사선 임페커블(USNSImpeccable)호의 군사정보수집에 대한 대립에서 반복되었다(이창위 2014). 이러한 반복된 충돌은 유엔해양법협약의 해석만으로는 배타적 경제수역내 미국의 정찰 활동을 현실적으로 막을 수 없다는 자성론으로 이어졌고, 방공식별구역의 선포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 그 선포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방공식별구역 선포 시, 해당 구역 진입 이전 반드시 자국 기관에 비행정보를 제공하게 하고, 항공기의 기종과 목적지를 통보함으로써 민감정보의 수집 시도 및 이에 따른 갈등을 예방할 수 있다는 논리이다. 이러한 시각은 실제 여러 중국 문헌에서도 확인되는 점이다 (신창훈 2014). 이처럼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선포는 단순히 한·중·일 세 국가 간 항공교통 관리를 둘러싼 단순 분쟁을 넘어, 미국과 중국 간 글로벌 거버넌스의 핵심원칙의 해석에 관한 갈등으로 해석될 여지도 존재한다. 그 의도에 관한 해석 여부는 차치하고,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선포가 동아시아 지역의 주요 안보 이슈 중 하나로 전화(轉化)한 것은 주변국인 한국과 일본의 위협 인식 및 대응이었다. 한국 정부는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선포 약 2주 후인 2013년 12월 8일,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 조정안을 공표하였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제정·개정된 현행 ‘대한민국 군용항공기 운용 등에 관한 법률’ 제2조 3항은 방공식별구역을 “국가안전보장 목적상 항공기의 용이한 식별, 위치 확인 및 통제가 요구되는 지상 및 해상의 일정 공역(空域)”으로 정의하며, 그 범위는 위의 <그림-1>과 같이 독도, 이어도 상공 지역을 포괄하는 것이다. 사실 미국이 51년 임의로 설정해 놓은 한국방공식별구역의 경우, 이어도는 물론 일본의 방공식별구역(JADIZ)이 설정된 홍도와 마라도 남방 영공을 포함하고 있지 않아 오랫동안 그 개정의 필요성이 제기된 상황이었다. 이어도 탐사가 미국의 KADIZ 설정 이듬해인 52년에 이루어지고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과의 조업 문제로 이어도를 포함하는 평화선을 선포하면서, KADIZ 재획정 문제가 대두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반복된 협상거부 및 한일관계 악화 우려로 인해 관련 논의는 수면 아래에 있다가 중국의 일방적 선언을 하나의 기회의 창으로 삼아 확장된 KADIZ를 선포하기에 이른 것이다 (권혁철 2015). 일본은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선포에 대해 직접적으로 강한 불만을 표시한바, 2013년 11월 28일 외무성 성명은 이를 “동아시아 지역에서 현상유지를 일방적으로 깨는 매우 위험한 행위(profoundly dangerous acts that unilaterally change the status quo in the East China Sea)”라고 비난하였다 (Mission of Japan to ASEAN, 2013). 사실, 일본의 경우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선포 이전, 이미 두 차례에 걸쳐 미국이 설정한 일본방공식별구역을 확장한 상황이었다. 첫 번째 확장 결정은 오키나와의 일본 반환 직후 동 지역을 포함시키기 위한 1972년의 결정이었으며, 두 번째 확장 결정은 일본 서남단에 위치한 요나구니섬(与那国島)을 포함시키기 위한 2010년의 결정이었다. 요나구니가 대만으로부터 약108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며, 일본의 확장 결정으로 대만의 방공식별 구역과 중첩되는 영역이 발생하였으나 대만이 이에 대해 뚜렷한 반발을 한 것은 아니다 (Trent 2020). 이처럼 방공식별구역은 냉전기 미국이 본토방위의 특수 목적을 위해 스스로 형성한 제도이자 한국과 일본에 이식한 국제관행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선포 자체를 비난할 만한 국제법적 근거는 없으며, 타국의 방공식별구역 및 센카쿠-다오위다오를 포함한 분쟁영토를 포함한 ‘확장성’ 및 이를 명확한 사전 협의 없이 선포한 외교적 소통 부족만을 정치적 견지에서 비판할 수 있을 뿐이다. 한국의 주요 언론은 이어도 해상기지를 포함한 중국 방공식별구역의 확장성 및 중국 대외정책의 공세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으나, 갈등에는 매우 오랜 기간동안 전개된 공해 및 배타적경제수역에서 군사활동의 허용여부에 관한 법적 논쟁 및 미-중 간 견해 불일치의 문제가 기저해 있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타국 방공식별구역 진입 증가에 따른 갈등 상기한 방공식별구역의 경쟁적 선포·확장이 단순히 외교적 갈등을 넘어 군사·안보적 분쟁의 촉발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위험성은 그 집행과정에 있다.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한 국가들은 그 이행을 담보하기 위해 자국의 군용항공기를 긴급발진(scramble)시켜, 사전 공지 없이 진입한 타국 항공기에 대한 감시(surveillance)·식별(identification)·요격(intercept)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다. 물론 영공과 구별되는 방공식별구역의 성격상 타국 군용기의 진입 에 대해 곧바로 격추를 위한 공격이 허용되지는 않으므로 곧바로 군사적 충돌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은 것은 아니다. 문제는 사전통고 없는 방공식별구역 진입 건수가 너무나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으며, 특히 중국은 이를 일종의 ‘전략적 신호발송(strategic signaling)’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 듯한 정황이 포착된다는 점이다. 아래 <표 1>은 중국 항공기가 사전 허가 없이 방공식별구역에 진입한 건수의 연간 추이를 나타낸 것인데, 특히 일본 방공식별구역에 대한 진입 건수가 센카쿠-다오위다오 분쟁 격화와 자국 방공식별구역 선포가 있었던 2010년-2016 기간에 약 9배가량 증가하는 추이를 보였다. 한국방공식별구역에 대해서는 확장선언 직후인 2014년, 2015년에는 뚜렷한 진입 상황이 관찰되지 않다가 사드배치 관련 갈등이 본격화된 2016년 이후 급증하고 있는 추이를 보이고 있다. 대만의 방공식별구역에 대해서도 차이잉원 총통 집권 이후, 중국과의 분리정책 강화 및 최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Comprehensive and Progressive Agreement for Trans-Pacific)가입 등 하나의 중국원칙에 반하는 행보를 보이자 사전통고 없는 진입 건수의 증가가 관측되고 있다. 이러한 추세를 고려하면, 중국이 핵심이익으로 간주하는 이슈에 반하는 주변국의 행보를 견제하기 위한 경고의 의미로 전략적 진입을 시도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표 1. 중국 항공기가 사전 허가 없이 방공식별구역에 진입한 연간 건수> 연도 일본 한국 대만 201096--2011156--2012306--2013415--2014464--2015571--201685150-201750080-2018638140-201967525>>20 <출처: Mercedes Trent, “Over the Line: The Implications of China’s ADIZ Intrusions in Northeast Asia,” Federation of American Scientists, 2020. p. 15.>  또 다른 각도에서 미국이 감행하는 항행의 자유작전에 대한 전략적 대응이라는 해석 역시 가능하다. 미국은 공해상 및 그 상공에서 무해통항의 원칙을 수호하기 위해 냉전기부터 세계 각지에서 항행의 자유 작전을 전개하고 있으며, 이러한 활동은 때로 일부 연안국과 충돌을 빚기도 하였다. 미국은 남중국해·동중국해 지역에서도 이러한 항행의 자유 작전을 주기적으로 실시해 왔으며, 이러한 활동은 분쟁상태에 있는 여러 도서에 대한 중국의 접근을 차단하여 영유권 주장을 약화 시키기 위한 것으로 중국은 인식한다. 예를 들어, 2016년 미 전함 커티스호가 남중국해 트리톤 섬(Triton Island, 中建岛)에서 단행한 항행의 자유 작전은 베트남의 영유권 주장을 지원하기 위한 것으로 중국측은 인식하였다 (You 2016, 642). 또한, 미국은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선포 직후, 이를 무력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전투기를 발진·진입시키기도 하였다. 이처럼 분쟁지역에서 자국의 영유권 주장 및 방공식별구역이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렇다면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동맹국 한국과 일본의 방공식별구역을 우리 역시 존중하지 않겠다.”라는 것이 중국이 보내는 전략적 메시지일 수 있다. 즉, 자국의 방공식별구역에 진입하는 미 군용항공기를 저지하여 감당하기 힘든 갈등 상황을 야기하기보다는 한·일 양국의 방공식별구역에 진입하는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일 수 있다. 필자가 인터뷰한 복수의 중국 전문가는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단행하는 대규모 군사훈련과 중국의 KADIZ 진입 사이에 상당한 연관성이 있음을 확인해 주기도 하였다. 이는 상대방이 하는 대로 되갚아 주되 그 강도와 대상을 다소 달리하는 일종의 ‘확장된 팃-포-탯(tit-for-tat) 전략’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러시아가 원칙적으로 방공식별구역을 국제관행으로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자국 영공 주변에 이를 설정하지 않는 나름의 일관성을 가지는 반면, 중국의 경우 이를 설정하면서 카디즈에 반복적으로 진입하는 것은 국제법의 관점에서 모순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당사국 간 협의를 위한 외교 플랫폼 구축의 필요성 방공식별구역을 둘러싼 갈등은 단순히 한국·중국·일본·대만 간 항공교통 안전을 위한 규칙 설정의 문제만은 아니다. 유엔해양법체제의 등장 이후 다소 축소된 공해의 범위 및 무해통항의 권리와 배타적경제수역에서 군사활동의 허용여부와 같은 법률해석을 둘러싼 세계적 차원의 규칙설정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주변 분쟁지역에 대한 접근확보를 시도하는 중국과 항행의 자유 작전을 통해 이를 무력화 하려는 미국의 시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미중갈등의 주요 이슈이기도 하다. 현재 미중 간 전략적 경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남중국해에서 항행의 자유작전 이상으로 미국과 중국의 실제 군사전력이 물리적 충돌에 다가가 있는 상황을 찾기 쉽지 않다. 이 갈등의 연장 선상에서 한국 카디즈에 대한 반복적 진입이 일종의 전략적 신호발송으로 기능하는 현 상황은 미중경쟁에의 연루를 최대한 회피해야 하는 한국에 대단히 곤혹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방공식별구역에 대한 ‘진입’은 영공에 대한 침범과 엄밀히 구별되어야 하지만, 중국·러시아의 군용항공기에 대응하여 우리 군용항공기가 긴급발진하는 상황의 반복은 국민들에게 안보 불안감을 안겨 줄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우리 정부는 관련 당사국이 방공식별구역 조정 및 조화로운 운영을 위한 규칙 마련을 위한 외교적 플랫폼 구축에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각국 간 첨예한 이해관계의 대립을 고려할 때, 이러한 플랫폼은 정부 간 공식 협의체보다는 1.5트랙 등의 형식으로 발족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특히, 제주도는 이어도 해양과학기지에 근접해 있다는 점과 제주포럼 등의 개최를 통해 구축된 ‘평화의 섬’으로서의 상징성을 고려할 때, 이러한 플랫폼의 물리적 공간으로서 최적의 후보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외교적 플랫폼 구축 노력에 제주도의 역할이 특히 기대되는 이유이다.   참고문헌 김한택,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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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 You. 2016. “The Sino-US ‘Cat-and-Mouse’ Game Concerning Freedom of Navigation and Flights: An Analysis of Chinese Perspectives,” Journal of Strategic Studies 39(5): 637-661.이 글에 포함된 의견은 저자 개인의 견해로 제주평화연구원의 공식입장과는 무관합니다. 저자소개  김유철은 2016년 12월 뉴욕 주립대학교(올버니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현재 덕성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통일연구원 부연구위원, 연세대학교·고려대학교 연구교수, 외교부 국립외교원 전문경력관 등을 거쳤다. 전공분야는 국제정치이며 다자조약, 미국외교정책, 미중관계등이 주요 연구분야이다. 주요논문으로는 "Is China Spoiling the Rules-Based Liberal International Order? Examining China’s Rising Institutional Power in a Multiplex World Through Competing Theories," Issues&Studies Vol. 56, No. 1 외 15여 편이 있다.
  • [평화담론] FTA 논의를 통한 아·태 지역 평화 구축과 한국의 역할
    저자
    최영미(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발간호
    2021-01
    I. 서론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 WTO) 중심의 다자주의를 기반으로 한 통상 질서를 선호했던 동아시아 역내 국가들은 1997-98년 아시아 금융 위기를 계기로 자유무역협정(Free Trade Agreement: FTA)과 같은 양자적 관계를 기본으로 한 지역경제협력체 형성 논의에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동아시아 지역에는 서구 유럽과 북미 지역의 유럽연합(European Union: EU) 및 북미자유무역협정(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 NAFTA)과 같이 다자적 논의의 형태가 아닌, 중첩적인 양자 FTA를 중심으로 지역경제협력 논의가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지역경제협력 논의는 ‘스파게티 볼 효과(spaghetti Bowl effect)’와 같은 부작용로 인해 더 높은 그리고 더 넓은 형태의 지역경제협력체 논의의 초석으로 작동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문제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냉전의 요소가 잔존하고 있는 동아시아 지역의 역내 국가들이 FTA를 경제적 최적(economic optimality)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과 동시에, 더욱 광범위한 수준에서 외교정책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은 동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급속히 성장한 경제적 리더십을 바탕으로 자국 중심의 통상 질서 수립을 위해 역내 다양한 FTA 논의를 이끌고 있다. 중-한, 중-호주 FTA와 같은 역내 양자적 FTA를 체결함과 동시에, 한·중·일 FTA(China-Japan-Korea FTA: CJK FTA), 동아시아 FTA(East Asia FTA: EA FTA),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egional Comprehensive Economic Parnership: RCEP) 등의 다자적 FTA 체결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왔다. 그러나 오랜 기간에도 불구하고 속도를 내지 못하던 이러한 논의들은, 최근 가장 큰 규모의 RCEP이 타결됨으로써 동아시아 지역주의 발전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자국 중심의 통상 질서 수립을 위한 중국의 움직임은 역외 국가로서 아·태 지역에서 오랜 기간 리더십을 유지해온 미국의 역할을 축소시켜 결국 경제·정치적으로 배제될 수 있다는 미국의 불안요인으로 작동하였다. 이에 오바마 행정부는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를 선언하며 아·태 지역에서 미국 중심의 통상 질서를 이끌고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을 견제 및 봉쇄하기 위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rans-Pacific Partnership: TPP) 논의를 발전시켜, 미국 주도의 TPP vs. 중국 주도의 RCEP으로 가시화된 미·중 FTA 경쟁 구도가 아·태 지역에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2017년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내세우며 등장한 트럼프 행정부는 TPP와 같은 자유무역을 기반으로 한 다자협력은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TPP 탈퇴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대중(對中) 무역 적자는 중국의 불공정한 거래에 의해 야기되었다 주장하며 중국 수입품에 고율 관세 부과와 함께 미·중 무역 분쟁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미·중 무역 분쟁은 통상 문제에 국한되지 않고, 환율 분쟁을 넘어 기술 영역까지 확대되며 결국 가치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예상들이 제기되었다. 정리하자면, 중국과 미국은 경제-안보 연계(economic-security nexus)를 기반으로 자국 중심의 정치·경제적 영향권의 구축을 위해 아·태 지역에서 경제적 패권 경쟁을 전개하고 있으며, 이러한 강대국 간 경쟁은 세계 경제 질서를 위협하며 아·태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협하고 있다. 대표적 무역 의존국인 한국은 FTA를 경제적 이익뿐만 아니라 다양한 외교 정책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으며, 그 결과 동아시아에서 싱가포르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국가와 FTA를 체결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에게 미·중 FTA 경쟁은 다양한 선택의 문제를 안겨주고 있다. 미·중 경쟁 사이 균형적 관계를 유지해온 한국은 위험회피 즉 헤징(hedging) 전략을 기반으로 양국 모두와 양자 FTA를 체결함과 동시에, 양국이 주도해온 메가 FTA 논의에도 적극적 태도를 견지해왔다. 그러나 미국의 새로운 바이든 행정부가 강조하고 있는 동맹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중국 때리기(China-bashing)’ 전략 등은 한국에게 다양한 선택의 문제를 안겨주며 한국의 전략적 모호성 및 헤징 전략의 유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코로나 위기가 야기한 국내 문제 해결에 방점을 찍고 있는 바이든 행정부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대외 통상 정책을 수립할 것인가에 대한 전 세계의 귀추가 주목되고 있는 상황 아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아·태 지역을 넘어 국제 사회의 정치·경제적 안정과 평화는 미·중 경쟁의 부침(浮沈)에 좌우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중 FTA 경쟁 하, 대표적 중견국인 한국은 국익 및 아·태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어떠한 FTA 대응 전략을 전개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아래에서는 먼저 미·중 FTA 전개 양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II. 미·중 FTA 경쟁의 전개 양상 동아시아는 그 오랜 열망에도 불구하고 가장 낮은 수준의 지역주의 논의가 발전된 지역이다. 그러나 1997-98년 동아시아 금융 위기 이후, 동아시아 역내 국가들은 지역경제 협력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역외 국가들과의 양자적 FTA(e.g., 한-칠레 FTA, 일-멕시코 FTA 등) 체결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역외·양자 FTA는 동아시아 역내 국가를 아우르는 지역주의 발전의 초석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이후 동아시아 국가들은 경제-안보 연계를 기반으로 역내 국가들과의 다자적 FTA 논의를 추진하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는 중국이 있었다. 아세안과의 FTA를 시작으로 중국은 싱가포르, 한국 등의 역내 국가와의 양자적 FTA를 체결함과 동시에, CJK FTA, EA FTA, RCEP 등 다양한 역내 다자 FTA 논의를 주도해왔다. <그림1> 아·태지역 경제협의체  중국 주도의 지역경제통합 논의는 역외국가인 미국에 있어 그동안 지역에서 유지해온 리더십의 쇠퇴 혹은 상실이라는 위협요인으로 다가왔다. 당시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는 ‘아시아로의 회귀’를 아·태지역의 주요 외교 전략으로 내세우며 중국이 제외된 TPP 가입을 일본, 호주, 한국과 같은 동아시아 주요 동맹국에게 제안함으로써, 중국의 경제적 리더십을 봉쇄하고 아·태지역에서 미국 중심의 통상 질서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미국의 리더십을 바탕으로 2015년 10월 타결된 이후 국내 비준을 기다리던 TPP는 2017년 ‘미국 우선주의’를 주창한 트럼프 대통령의 등장과 함께 전환을 맞이하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TPP가 미국인의 일자리를 빼앗고 미국의 이익에 반한다고 주장하며 같은 해 1월 TPP에서 탈퇴하였다. 미국이 떠난 자리를 일본과 호주가 이끌며 TPP는 현재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omprehensive and progressive Trans-Pacific Partnership: CPTPP)’으로 새롭게 출범하여 2018년 발효되었다. 트럼프의 TPP 탈퇴 및 2018년 본격적으로 가시화된 미·중 무역 분쟁 등 미·중 간 양자적 형태를 중심으로 전개된 미·중 경제적 패권 경쟁은 바이든 대통령의 당선으로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기존 정권의 소위 ‘중국 때리기’로 대표되는 공세적 대중 정책은 지속될 것이나, 일방주의(unilateralism)를 기반으로 동맹 및 비동맹의 구분이 없는 공세적 접근보다는 다자적·배타적 성격의 동맹 네트워크를 통한 중국 압박 정책이 예상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의 당선이 유력시 되던 지난 2020년 11월 15일 RCEP은 9년간의 오랜 논의에 종지부를 찍으며 인도를 제외하고 최종적으로 타결되었다. 본래 RCEP는 2011년 아세안 의장국이었던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한 아세안의 주도에 의해 제안되었으나, 실제 협상 과정에서 중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중국은 지난 3월 국내 비준 절차도 마무리 지으며 현재 발효 준비를 마친 상태이다. RCEP은 현재 중국, 일본, 싱가포르, 태국 등의 4개국이 비준 절차를 마친 상태로, 앞으로 남은 아세안 4개국과 비아세안 1개국이 비준을 통과하면 RCEP은 발효될 예정이다. <그림2> RCEP vs. CPTPP  TPP 체결 당시 부통령으로서 핵심적 역할을 했던 바이든 대통령이 CPTPP로의 복귀할 것인지에 대한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현재까지는 미국의 국내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그 전망이 밝지 않은 상황이다. 팬데믹 위기 상황 관리와 같은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국내정치적 문제들에 밀려 아·태지역에서의 구체적인 통상 정책 수립 계획은 정책의 후순위에 놓여 있다. 또한 2022 중간 선거를 고려하여 다자주의를 근간으로 한 자유무역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RCEP의 타결은 2021년 1월 정부 출범 이후 ‘코로나 위기 극복’이라는 국내 문제에 방점을 찍고 있는 바이든 행정부에 전 미국 무역대표부(USTR) 부대표 웬디 커틀러(Wendy Cutler)의 언급대로 경고음(Wake-up call)을 울리고 있다(Cutler 2020). 미국의 TPP 탈퇴로 인한 아·태 통상 질서 리더십의 빈자리를 중국이 RCEP 체결을 통해 메우고, 교역 및 투자의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성장할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화된 것이라는 목소리들이 미국 내부 및 세계 각지에서 제기되고 있다(Haass 2017; Heydarian 2017).<그림2>에서 볼 수 있듯이, RCEP은 발효 시 전 세계 GDP와 인구의 측면에서 30%를 차지하는 가장 큰 규모의 경제블록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RCEP이 세계 경제 성장을 견인하고 세계 경제의 중심을 아시아로 이끌어 낼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지역 통합적 의미에서도 RCEP은 한·중·일 삼국이 낮은 수준의 FTA를 체결한 효과를 지닌다. 물론 RCEP을 중심으로 아·태 지역의 통상 질서를 주도하기에는 낮은 수준의 시장 자유화라는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 예를 들어 CPTPP와 달리 RCEP은 노동 및 환경 표준 등을 다루지 않고 있으며 서비스 및 투자에 대한 제한도 크다. 그러나 ‘미국이 돌아왔다(America is back)’는 바이든의 정치적 선언을 기반으로 고려했을 때, 그리고 중국 주도의 RCEP이 체결된 상황을 감안했을 때,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아·태 지역의 통상 질서 수립을 위한 장으로 복귀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것이 CPTPP로의 복귀, 한국 등의 우방 국가를 포함한 G7의 확대 버전, 혹은 트럼프 행정부가 강조한 경제번영네트워크(Economic Prosperity Network: EPN)의 유사 버전, 혹은 미국-멕시코-캐나다(U.S.-Mexico-Canada: USMCA) 자유무역협정을 기반으로 인도를 포함한 바이든 행정부의 새로운 버전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이 경제협력 논의체들의 공통점은 중국 경제와의 디커플링(decoupling)을 목적으로 인권, 환경, 노동 문제 등에 있어 높은 기준을 요하여 중국의 참여가 현실적으로 힘든 경제통합 논의의 형태를 띨 것으로 기대된다. 결국 아·태 지역에서의 미·중 경제 패권 경쟁은 미국의 새로운 행정부 하에서도 지속될 것이며, 트럼프 행정부의 미·중 무역전쟁과 같은 양자적 형태에서 동맹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한 다자적 경제 통합 논의의 형태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또한 과거 상품과 서비스 중심의 통상 질서 형성을 위한 경쟁이었다면, 새로운 시대의 미·중 경제 패권 전쟁은 디지털 경제 전환과 더불어 자국 중심의 국제 디지털 통상 질서 개편을 위한 경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 영역과 범위를 확장시키고 있는 미·중 FTA 경쟁이 세계 경제 질서 및 안정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 아래, 대표적인 중견국으로서 한국이 어떠한 전략적 대응으로 아·태 지역의 평화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자. III. 미·중 FTA 경쟁 하 아·태 지역 평화 구축을 위한 한국의 역할 G2로 대표되는 세계 양대 경제의 FTA 경쟁 아래, 한국과 같은 중견국 및 약소국은 선택의 딜레마에 빠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국의 오랜 동맹국으로 군사·안보적 측면에서 중요한 국가인 미국과, 1992년 수교 이후 꾸준히 증가한 무역량으로 경제적 중요성과 동시에 북 핵 위기 이후 한반도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증가시키고 있는 중국 간 경쟁은 한국에게 다양한 선택의 문제를 부여해왔다. 일반적으로 중견국은 국제 사회에서 차지하는 그들의 중간적인 능력과 의지를 기반으로 특정 외교 정책을 전개하는데, 강대국간 긴장이 고조되는 경우 주로 위험회피전략 즉 헤징 전략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 강대국간 패권 경쟁이 유발하는 역동 아래, 중견국은 강성(hard), 연성(soft), 이중(double) 등 다양한 헤징 전략을 전개하는데, 경쟁을 벌이는 양국 모두와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양국 모두에게 그 중견국이 중요 행위자가 될 정도의 충분한 능력을 보유한 경우. 그 중견국은 이중헤징 전략을 선택하는 경향을 보인다. 미·중 FTA 경쟁 하, 한국은 양국 모두와 양자적 FTA를 체결함과 동시에 양국이 주도하는 다자적 FTA 논의에 참여함으로써 미·중 FTA 경쟁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을 회피하거나 축소시키기 위한 이중 헤징 전략을 전개해왔다. 다시 말해, 한국은 한미 FTA 체결 후, 중국의 제안 아래 한중 FTA 역시 체결하였으며, 중국 주도의 EA FTA 및 RCEP 논의에 초기 단계부터 적극적으로 참여함과 동시에 미국 주도의 TPP에 꾸준한 관심을 보여 왔다. 예를 들어, 한국은 2004년 부시-노무현 정부 아래 상대적으로 소원해진 한·미 관계의 복원을 위해 한미 FTA 체결 논의를 시작하였다. 8차례의 공식 협상 이후, 2007년 4월 한미 FTA는 최종적으로 타결되었다. 그러나 타결 직후, 한·미 양국 내 피해가 예상되는 산업(e.g., 한국의 농산업, 미국의 자동차 산업 등)을 중심으로 격렬한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광우병 문제 등 특정 이슈들은 국내적으로 정치화되면서 비준 과정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한국 FTA 역사 상 가장 오랜 기간인 4년간의 국내 비준 과정을 거쳐 2012년 마침내 한미 FTA가 발효되었다. 한미 FTA 논의가 시작된 직후, 중국은 한미 FTA를 통한 역내 예상되는 미국의 영향력을 상쇄하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에게 한중 FTA 체결을 제안하였다. 이에 한국은 현재 집중하고 있는 한미 FTA 체결을 마무리 지은 후, 한중 FTA를 추진하겠다는 공식 입장을 표명하였다. 그 후 한미 FTA가 체결된 약 5개월 후인 2007년 9월 한중 FTA 체결을 위한 민간공동연구를 시작하였다. 14차례의 공식 협상을 거쳐 마침내 2015년 정식 체결 후, 10개월이란 짧은 국내 비준 과정을 거쳐 같은 해 12월 한중 FTA 역시 발효되었다. 이러한 미·중 양국 모두와의 양자적 FTA 체결과 동시에, 한국은 미·중이 주도하는 다자적 FTA 논의에 전략적으로 참여해왔다. 예를 들어, 한국은 동아시아 지역주의 발전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주로 중국이 주도해온 동아시아 지역주의의 발전을 위한 CJK FTA, EA FTA, 및 RCEP 논의에 적극적 태도를 견지해왔다. 특히 동아시아 금융위기 이후 지역경제협력의 필요성을 절감한 한국은 아세안+3(e.g., 한·중·일) 형태의 지역경제협력체의 형성을 위해 김대중 정부의 동아시아비전그룹(East Asia Vision Group: EAVG) 및 동아시아연구그룹(East  Asia  Study  Group: EASG) 창설 제안 등, 동아시아 지역주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다양한 노력들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문제는 2010년 미국이 TPP 참여를 결정하고 동아시아의 가장 중요한 동맹국인 일본과 한국에 참여를 제안했을 때, 한국이 선택의 딜레마에 빠지며 발생하였다. 당시 한국은 한중 FTA 협상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일본과는 달리 미국의 제안에 적극적으로 응답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당시 일본은 동아시아포괄적경제파트너십(Comprehensive Economic Partnership in East Asia: CEPEA)을 주도적으로 이끌며, 중국 주도의 지역경제 질서를 견제하고자 했던 상황 아래, 미국의 TPP 참여 제안은 반가운 소식이었으며 2013년 TPP 참여를 공식으로 선언하였다. 2014년 한중 FTA 타결 직후, 한국은 TPP 참여를 위해 양자 예비협상을 시작하는 등 TPP 참여에 적극적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의 TPP에 대한 관심 표명을 환영하는 바이나, 새 참가국의 합류는 TPP 협상이 결론이 난 이후에 가능하다고 입장을 밝히며 한국의 참여를 제한하였다(USTR 2019). 결국 2015년 10월 한국을 제외하고 미국, 일본을 포함한 12개국 간 협상이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당시 미국과 일본의 국내 산업 보호 문제(e.g., 미국의 자동차 산업 vs. 일본의 농업)의 극복이 어려울 것이라는 예측들이 제기되었으나, 결국 TPP 타결은 오바마 행정부의 ‘아시아로의 회귀’와 아베노믹스(Abenomics)의 ‘세번째 화살(third arrow)’로 대표되는 다양한 국내 및 국제 정치적 이익에 대한 합의점을 찾으며 성사되었다. TPP 타결로 미·중 FTA 경쟁의 승기는 미국 측으로 기우는 듯하였다. 그러나 2017년 트럼프 행정부의 TPP 탈퇴와 2020년 RCEP의 타결은 다시 세계 통상 질서의 판도를 변화시키고 있다. RCEP의 서명 후, 현재 국내 비준을 준비하고 있는 한국은 외교적 시험대에 다시 놓였다. 한국의 FTA 정책을 둘러싼 국내·외적 상황은 과거에 비해 더욱 어려운 조건들로 가득하다. 팬데믹으로 인한 세계적 경기 침제와 더불어, 2019년 미니딜(mini deal) 이후 휴전 국면으로 접어든 미·중 무역 분쟁 및 기술 전쟁의 재발 가능성, 그리고 바이든 행정부 하 더욱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한미일 삼각 공조체제로 인한 한·미·일 vs. 북·중·러 등의 신냉전 체제의 형성 가능성 등 미·중 경쟁의 평화적 해결보다 미·중 간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는 다수의 요인이 산재해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들은 한국이 견지해온 전략적 모호성을 유지함으로써 위험을 회피하는 헤징 전략을 전개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위협 요인과 동시에 기회 요인도 존재한다. 먼저 과거 첨예하게 대립했던 ‘TPP vs. RCEP’의 대결구도가 어느 정도 희석된 상황이다. 예를 들어, CPTPP와 RCEP에 모두 가입한 나라만 해도 <그림1>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싱가포르, 브루나이, 베트남, 말레이시아, 일본, 호주, 뉴질랜드 등 7개국에 달한다. 이 중 가장 눈에 띄는 사례는 바로 일본의 동시 가입이다. 게다가 일본은 예상과 달리, 국내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지난 4월 RCEP의 국내 비준 절차를 빠르게 마무리하였다. 이러한 상황 아래, 한국은 바이든 행정부가 CPTPP로의 복귀를 확답하지 않은 현재 선제적으로 CPTPP에 가입을 준비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하다. 향후, 바이든 행정부가 아·태지역의 통상 질서 주도 논의로 복귀하는 방법에는 CPTPP로의 복귀, G7의 확대 버전, 혹은 EPN의 유사 버전 등 다양한 형태와 방법들이 예상되고 있는 상황 아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그 어떤 형태이든 미국은 한국, 일본, 호주 등의 기존의 오래된 동맹국들과의 경제적 연대를 요구할 것이라는 점이다. 미국의 TPP 가입 제안을 망설이다 가입 시기를 놓쳤던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이 선제적으로 CPTPP에 가입함으로써 향후의 미·중 간 선택의 문제가 가져올 수 있는 위험 요인을 부분적으로 낮출 수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CPTPP의 가입은 RCEP에 비해 이미 발효된 상태이기에 빠르고, 한미 FTA와 유사한 수준의 시장 개방도를 요구하기에 일본 시장 접근 측면에서 기대되는 반사 이익이 RCEP에 비해 크고, 이미 가입국 다수와 양자 FTA를 체결하고 있기에 한국이 CPTPP 가입에 주저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Schott 2021). 그러나 일각에서는 1998년 시작된 한일 양자 FTA 논의가 2005년 이후 중단된 이유 등을 바탕으로 한국이 CPTPP에 참여할 경우 비관세 장벽(Non-tariff Barriers: NTBs)이 높은 일본과의 시장개방효과는 더욱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주장과 동시에, CPTPP가 한국이 체결한 FTA 중 가장 높은 수준의 자유화 범위와 규범을 요구하기에 국영기업, 환경, 지적재산권 등 신통상규범에 대한 더욱 세부적인 검토를 위해 아직은 충분한 필요하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무역의존도가 높은 한국에게 CPTPP 그리고 RCEP과 같은 메가 통상 네트워크에 가입하는 것은 미·중 선택의 문제가 아닌 경제적 최적을 달성하는데 있어 긍정적 효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 시점에서 더욱 중요한 문제는 한국이 향후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통상 질서 아래 더욱 높아질 것으로 예상되는 환경, 노동 등의 통상 규범을 준수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냐는 것이다. 미·중 FTA 경쟁 아래에서의 위협요인을 최소화하고 기회요인을 최대화하기 위해서 한국은 미국과 중국의 주요 동반국으로서 양국이 주도하는 경제 협력체 논의에 협력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음을 강하게 어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미·중이 추진하고 있는 메가 FTA에 대한 한국의 참여가 반미 그리고 반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통상 목표 및 방향성을 기준으로 내린 결정임을 명확히 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이든 행정부 하, 그 강도가 심화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 미·중 FTA 경쟁 아래 한국은 자국의 이익 추구를 넘어 대표적 중견국으로서 공동체의 이익을 위한 아·태 지역의 평화와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외교 정책을 전개해야 한다. 문제는 한국이 이러한 중견국 외교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보유하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인데 한국은 미·중을 비롯하여 아세안, 인도, 뉴질랜드, 호주 등 아·태 지역의 주요 경제 및 역외의 EU 등 세계 주요 경제권들과의 FTA를 체결하여 FTA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 경제 권력을 보유하고 있다. 중견국 외교 수행을 위한 의지 측면에서도 한국은 EAVG, EASG 창설 및 믹타(Mexico, Indonesia, South Korea, Turkey, Australia: MIKTA), P4G(artnering for Green Growth and the Global Goals 2030) 등의 협의체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아·태 지역 및 글로벌 수준의 평화·발전을 위해 구체적인 노력들을 기울여왔다. 한국이 오랫동안 주장해온 FTA 허브(hub) 혹은 FTA 린치핀(linchpin)으로서 동북아시아 평화와 번영을 위해 기울인 노력들이 한국의 차기 정부 아래 어떠한 가시적인 성과를 가져올지에 대한 기대가 크다.  IV. 결론 전 세계의 기대와 달리 미국 우선주의를 기반으로 한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는 바이든 행정부의 ‘바이 아메리칸(Buy American)’ 정책 아래 일정 기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 위기로 인해 국내 경기 부양책에 방점을 찍고 있는 바이든 행정부의 정책 기조는 경제적 자국우선주의와 국가안보를 연결시켰던 트럼프 행정부의 방향성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트럼프 행정부가 설계했던 반덤핑상계관세 등의 각종 보호무역조치도 당분간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Anderson 2021). 바이든 행정부의 보호무역 조치는 트럼프 행정부의 양자주의와 달리 미국 보호무역주의의 핵심인 중국 제재에 다자주의적 접근법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미국의 중국 압박 형태가 국제규범 혹은 국제기구를 통해서가 아닌, 주로 미국 국내법을 통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했을 때, 바이든 행정부가 강조하는 다자간 무역협상은 중국이 포함된 WTO 중심이 아니라, 경제 및 통상을 넘어 인권, 환경 등의 문제까지 포함된 전방위 분야에서의 동맹 강화를 통한 다자적 접근일 가능성이 크다. 이 경우 한국은 트럼프 행정부에 비해 더욱 강도 높은 선택의 문제와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2016년 한국의 사드 배치 결정으로 인한 중국의 ‘한한령(限韓令)’으로 대표되는 경제 보복 조치와 같은 상황에 또 다시 놓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경제 및 통상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안보 영역에서의 쿼드(Quad), 그리고 기술 영역에서의 클린네트워크(clean network) 등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계승될 확률이 높은 다양한 영역에서의 문제들로 가시화될 확률이 높다. 2021년 임기를 시작한 바이든 행정부는 보호무역주의를 큰 틀에서 유지하기에 앞서 과연 트럼프 행정부의 그것이 2020년 대선 결과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또한 국제질서의 설계자이자 수호자임을 자청했던 미국의 국제사회에서의 이미지가 트럼프 행정부 하에서 어떻게 변화했으며 이러한 변화가 미국의 패권 유지 및 국익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는지에 대한 숙고를 선행해야 한다.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전 세계 보건위기에 효율적 글로벌 공공재를 제시하지 못함과 동시에 서로 책임을 전가하려는 미중 경쟁을 통해 한국을 포함한 세계는 이제 ‘투키디데스 함정(Tuchididdes Trap)’이 아닌 ‘킨들버거 함정(kindleberger trap)’을 맞이했음이 여실히 드러났다. 세계 패권이 되기 위한 조건은 단순히 ‘통상 질서’라는 글로벌 공공재를 제공하기 위해 경쟁하는 것이 아닌 더욱 많은 국가들이 참여할 수 있는 ‘안정적 통상 질서’의 형성 및 제공이라는 점을 미·중은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미·중 경쟁이 가져오는 국제 정세의 불안정성 아래 한국은 더욱 장기적인 관점에서 기존 미·중·일·러의 4강 중심의 외교정책을 넘어 아세안 및 인도 등의 신남방국가 및 중앙아시아 국가 등 신북방국가와의 관계 강화를 통해 한국 경제 및 외교의 지평을 넓히고, 능력을 기반으로 그에 걸맞은 자국 중심이 아닌 공동체 중심의 중견국 외교의 강화를 위해 노력해야한다. 그 경우 한국이 숙원해온 해양세력과 대륙세력, 그리고 선진국과 개도국을 연결하여 아·태 지역을 넘어 국제사회의 평화와 발전을 주도하는 진정한 교량국가(bridging state)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끝>   참고문헌 Anderson, S. 2021. “Biden Continues Trump’s Misguided Trade Policies.” Forbes May 5, 2021. Retrieved from https://www.forbes.com/sites/stuartanderson/2021/05/05/biden-continues-trumps-misguided-trade-policies/?sh=20346df24385 Cutler, W. 2020. “RCEP Agreement: Another Wake-up Call for the United States on Trade.” Asia Society Policy Institute. Retrieved from https://asiasociety.org/policy-institute/rcep-agreement-another-wake-call-united-states-trade. Haass, R. 2017. “Trump’s Biggest Mistake in Asia: Rejecting Trade,” Axios November 14, 2017. Retrieved from https://www.axios.com/trumps-biggest-mistake-in-asiarejecting-trade-2509089488.html. Heydarian. R. 2017. “This is How a Superpower Commits Suicide,” Washington Post November 13, 2017. Retrieved from https://www.washingtonpost.com/news/theworldpost/wp/2017/11/13/trump-china/. Schott, J. 2021. “RCEP Is Not Enough: South Korea Also Needs to Joint the CPTPP.” Policy Brief Peterson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 Retrieved from https://www.piie.com/sites/default/files/documents/pb21-17.pdf. United States Trade Representative (USTR). 2019. “Statement by U.S. Trade Representative Michael Froman on Korea’s Announcement Regarding the Trans-Pacific Partnership” Retrieved from https://ustr.gov/about-us/policy-offices/press-office/press-releases/2013/November/Froman-statement-TPP-Korea.이 글에 포함된 의견은 저자 개인의 견해로 제주평화연구원의 공식입장과는 무관합니다.저자소개  최영미 | 現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석사 졸업 후, University of Wisconsin-Milwaukee에서 정치학 박사를 취득하였음. 국제정치경제를 전공으로 하여 통상정책에 대한 계량분석을 주로 연구하고 있음. 주요 연구로는 “Constituency, Ideology, and Economic Interests in U.S. Congressional Voting: The Case of the U.S.–Korea Free Trade Agreement,” Political Research Quarterly 68(2); “Political economy of free trade agreements in China, Japan, and South Korea: sectoral politics of the FTA wave, 1998–2016” Japanese Journal of Political Science 21(3)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