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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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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담론] 정치적 화해의 관점에서 본 제주 4.3 사건
등록일
2022-02-14
조회수
15
역사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이 ‘극단의 시대’라 명명하기도 했던 지난 20세기는 세계 곳곳에 참혹한 전쟁과 학살, 독재와 인권 유린의 상처를 남겼다. 이와 같은 비극을 경험한 국가와 사회가 평화와 민주화의 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폭력과 불의를 어떻게 마주하고 훼손된 정의를 회복할 것인가의 문제는 20세기 후반부터 전환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라는 주제로 국제 인권 및 평화 담론의 핵심 이슈 중 하나로 부각되었다(김헌준 2017). 가혹한 폭력과 인권유린을 자행한 국가 권력과 가해자들은 그들의 행동에 대해 어떤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하는가? 피해자와 생존자들의 상처, 피해, 훼손된 명예는 어떻게 회복되고 보상받아야 하는가? 폭력과 파괴를 경험한 사회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진정한 공존과 평화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떤 조치들이 취해져야 하는가? 개인·사회·국가 간 화해를 다루는 이 같은 핵심 질문은 갈등의 단순한 종식과 예방을 넘어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를 이룩하기 위해 반드시 다뤄져야 할 문제들이었으며, 전쟁과 갈등, 독재 통치를 경험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형태의 대답과 정책들이 시도되었다.

20세기 냉전의 최전선에서 권위주의 독재 통치 하에 다양한 형태의 인권 유린을 경험한 한국 사회 역시 그 예외는 아니었다. 오랜 독재와 냉전이 종식된 이후 시민사회와 학계, 정치권에서는 과거의 어두운 역사를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이는 한국 사회의 인권 및 평화 담론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 글은 정치적 화해의 윤리적 지침이 되는 다양한 정의(justice)의 개념을 살펴보고 민주화 이후 과거의 인권유린을 극복하고 정치적 화해를 이룩하기 위해 이루어진 노력의 대표적 사례로서 제주 4.3 사건의 진상규명 노력과 정부사과, 그리고 그 후속조치를 살펴본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에서 1954년에 걸쳐 제주도에서 벌어진 소요 사태 진압 과정에서 있었던 무차별적 국가 폭력으로 인해 수많은 무고한 인명이 희생당하고 지역 공동체가 파괴된 사건이었다. 사건의 진실은 독재 정권의 억압 하에 철저히 은폐·왜곡 되었으며 생존자와 피해자 가족들은 수십 년에 걸쳐 사회적 낙인과 연좌제로 고통 받았다. 제주 4.3 사건의 진상규명은 가혹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제주 4.3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자 애썼던 시민사회의 노력이 있었기에 시작될 수 있었다. 이렇게 지속된 시민사회의 움직임에 민주화 이후 정치권이 합류하면서 제주 4.3 사건의 진실규명 노력은 1990년대 말부터 보다 구체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대한 특별법 통과와 함께 한국판 ‘진실과 화해 위원회’라 할 수 있는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가 공식 기관으로 발족되어 정치적 화해의 첫 번째 단계라 할 수 있는 체계적인 진실 규명 및 명예회복 노력이 이루어졌다. 이어 노무현 정부에서 있었던 최초의 국가수반에 의한 정부 책임 인정과 사과는 진상조사보고서 결론에 기반을 둔 4.3 위원회의 건의안을 이행하고 피해자들의 불명예를 씻어준 중요한 의미를 갖는 성취라 평가된다. 이 같은 제주 4.3 사건에 관한 담론과 정책은 문재인 정부 시기 제주 4.3 특별법 개정안 통과 및 피해자에 대한 배보상 논의 구체화와 함께 현재도 활발히 진행 중이다.

 
  1. 정치적 화해에 있어 정의의 중요성

제노사이드, 전쟁범죄, 민간인 학살, 체제차원의 인권유린 등과 같은 잔학행위가 발생한 이후 우리는 흔히 복수와 용서, 그리고 그 양극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대응방식을 놓고 고민하게 된다(Minow 1998). 전쟁, 내전, 식민통치, 독재통치 등이 종식된 후 새로운 시대로 이행하는 사회는 과거 자행된 과오를 어떻게 다루고 또 기억해야 하는가? 현재의 분쟁과 갈등이 종식되는 것을 뜻하는 소극적 평화 (negative peace)가 아니라 보다 지속가능한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를 추구하는 데 있어 정의에 기반을 둔 화해의 정치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분쟁과 갈등으로부터 갓 벗어난 사회는 흔히 다음과 같은 다양한 정책 옵션들을 검토하게 되는데, 이는 어떠한 형태의 정의가 구현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각기 다른 관점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첫 번째는 가해자 처벌에 초점을 둔 형사기소의 방식으로, 과거의 국가 폭력이나 범죄행위에 대한 법적 조사와 처벌을 통해 제노사이드, 학살 및 기타 중대한 인권침해를 자행한 개개인에게 책임을 지우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가해자의 직접적 처벌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되 피해자와 생존자들이 자신에게 벌어진 인권침해의 실태와 그 맥락을 알 권리가 있다는 원칙에 바탕을 두고 진실규명에 초점을 두는 진실위원회(truth commission)가 있다. 이와 더불어 세 번째로는 과거의 불의로 인해 발생한 물질적·정신적 피해를 수복하기 위한 재정적 보상 혹은 정부 차원의 공식사과나 추념일 지정, 추념사업 진행 등과 같은 상징적 노력을 수반하는 배보상(reparation) 정책이 있다. 네 번째 방식은 과거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경찰, 군, 사법제도 등 제도 일반을 재검토하고 재구축하는 제도 개혁(institutional reform)이다. 이처럼 이행기 사회의 정의 추구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정치적 화해는 과거의 불의로 인해 야기된 심대한 인권유린과 파괴된 사회적 관계를 묵과하지 않고 바로 세우고자 하는 것이며, 이는 과거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개인, 사회 및 국가 구성원에게 끼친 다양한 상처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다방면의 노력을 가리키는 개념이기도 하다(Philpott 2012). 이 과정에서 중요한 윤리적 지침이 되는 것이 바로 정의의 개념인데, 이는 종교적 교리, 지역사회 문화, 공동체 정체성, 국제인권 규범 등과 같은 다양한 가치와 원칙에 바탕을 두게 되며 그런 점에서 시대와 장소, 사안의 성격에 따라 다른 접근법과 전략을 갖게 된다(Boesenecker and Vinjamuri 2014).

정의에 대한 여러 접근법 중 가장 대표적이고 또 대비되는 것이 응보적 정의(retributive justice)와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이다. 먼저 응보적 정의는 과거 발생한 불의에 대한 처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잘못이 있는 자를 징벌함으로써 피해자와 생존자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새로운 정치질서의 정당성을 확립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해자 역시 온당한 처벌을 받고 죗값을 치른 후 동등한 주체로서 공동체 구성원으로 사회에 재합류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정치적 화해에도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다 (Philpott 2010; 2012). 응보적 정의의 대표적 적용 방식으로는 앞서 언급한 형사기소를 들 수 있다. 사법절차를 통한 형사기소와 처벌은 과거의 정치적 폭력과 반인권 범죄를 공식 기록으로 남길 뿐만 아니라 개인에게 법적 책임을 명확히 물음으로써 불특정 다수에게 무분별한 비난이 가해지는 것을 방지한다는 면에서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기소와 형사재판 같은 방식의 응보적 정의에는 여러 한계와 문제점 또한 존재한다. 명확한 책임규명이라는 이점이 있기는 하지만 개개인의 형사 처분은 궁극적으로 책임을 개인화하는 것이며 모든 가해자를 처벌하지 못하는 현실여건상 결국 일부 개인만을 선택하여 징벌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처벌 대상 선별의 문제는 가해자 집단을 필연적으로 축소시키게 되며, 기소가 이루어지지 않은 사건은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묵인된다는 문제점 또한 존재한다. 또한 응보적 정의에 기초한 처벌은 많은 경우 해당 시점의 권력관계를 반영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공정한 재판이 아닌 ‘승자의 정의(victor’s justice)’가 될 가능성을 내포한다. 또한 정의에 따른 처벌이 아니라 마녀사냥이 될 위험이 있으며, 처벌받는 이들이 불만이나 원한을 품게 됨으로써 정치적 화해가 저해될 수 있다는 우려 역시 수반한다(Minow 1998).

이 같은 응보적 정의의 한계를 보완하고 개선하기 위한 접근법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회복적 정의의 개념이다. 응보적 정의가 개개인의 책임 규명과 처벌에 집중하는 반면, 회복적 정의는 피해자의 상처 치유와 공동체 차원의 신뢰회복 및 화해를 목표로 한다는 점에서 둘은 크게 대비된다. 응보적 정의가 개인 차원에 초점을 둔 정의구현 방식이라면, 회복적 정의는 과거 불의로 인해 파괴된 개인 간 관계 그리고 개인과 사회의 관계 회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관계적 차원에 초점을 둔 정의 구현 방식이라 할 수 있다(Llewellyn and Philpott 2014).

회복적 정의의 보다 구체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먼저 검사와 피고인이 중심이 되는 형사재판과 달리 과거 범죄관련 행위자와 피해자, 목격자 및 공동체 구성원 모두를 포괄한다. 진실위원회의 공청회와 같은 절차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에게 권한을 주고 힘을 실어주는(empower) 것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며, 가능한 다수의 사람을 포함하는 정책결정과정을 추구한다. 또한 피해자의 알 권리 및 이들이 입은 피해와 상처에 큰 관심을 두고 그 회복을 포함한 공동체 구성원 전반의 관계회복을 강조한다. 또한 회복적 정의는 피해자들의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피해에 대한 물질적·상징적 보상을 수반하기도 하는데 이는 개개인의 법적 배보상 권리(entitlement)를 넘어 피해자들과 사회의 회복에 보다 중점을 둔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전통에 입각한 배상적 정의(restitutive justice)와 구별된다(Philpott 2012).

회복적 정의를 실제 적용한 대표적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이 데즈먼드 투투 성공회 대주교(Archbishop Desmond Tutu)가 이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진실과 화해 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이다.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1990년대 초 인종분리정책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의 종식과 함께 민주적 선거에 의한 흑백연합정부가 수립되면서 도입되었다. 이는 과거 자행된 인권유린의 실태를 조사하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구미 법학계에서 논의되던 회복적정의 개념에 주목하여 이를 정치적 화해를 위한 실천 전략으로서 선택된 것이었다. 남아공의 경우 특이하게도 무엇보다 진실을 밝히는 데 주안점을 두어 가해자의 자백을 받고자 필요에 따라 사면을 제공하기도 했다. 나아가 피해자의 개념을 폭넓게 규정하여 직접피해자를 넘어 간접적 피해를 입은 이들까지 지원을 제공하고자 했으며, 전체 사회 공동체를 진실규명 과정의 참여자이자 증인으로 포함시켜 과거 원한의 해소를 넘어선 미래지향적 공동체 건설을 목표로 제시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Llwellyn 2007). 이처럼 관계의 회복에 초점을 둔 남아공의 정의 추구 방식은 남아공의 민주화에도 긍정적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Gutmann and Thompson 2000).  


  1. 제주 4.3의 진상규명과 정치적 화해를 위한 노력

한국 사회에서도 민주화 이후 과거 독재통치와 냉전의 영향 하에 벌어진 심각한 인권유린의 진실을 밝히고 진정한 정치적 화해를 통해 사회통합을 이루려는 시도는 여러 부문과 사안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제주 4.3 사건의 진상규명과 피해자의 명예회복 노력, 정부 사과는 정치적 화해를 위한 한국 사회의 노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이고도 중요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에서 1954년 사이 제주도에서 벌어진 소요 사태 진압 과정에서 나타난 무력 충돌과 국가 폭력으로 인해 다수의 제주도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남로당 제주도당의 봉기일인 1948년 4월 3일에서 그 이름을 따 ‘4.3 사건’이라 불리지만, 폭력의 시발점은 1947년 3월 1일의 3.1절 제주도대회에서 있었던 군중에 대한 경찰의 발포 사건이었다. 이후 어지러워진 민심을 바탕으로 남로당 제주도당이 총파업을 일으키자 미군정과 경찰은 이를 공산세력의 준동으로 간주하고 무차별적 폭력과 테러로 악명 높았던 극우단체 서북청년단까지 동원하며 대대적 진압작전을 개시했다. 1948년 4월 3일의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봉기, 5월 10일의 제주 지역 총선 무산 후 이승만 정권은 군 병력을 증파하며 제주도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한층 더 무자비한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11월부터 약 4개월에 걸쳐 진행된 무장대 토벌 및 초토화 작전으로 인해 제주도 중산간지대 95% 이상의 마을이 불타거나 파괴되었고, 중산간 지역은 물론 여타 지역에서 수만 명의 무고한 주민들이 군과 경찰, 서북청년단에 의해 감금·고문·살해되었다. 1949년 한라산 일대의 무장대가 사실상 궤멸된 후에도 가혹한 탄압은 지속되었다. 귀순하면 용서하겠다는 군경의 약속을 믿고 산에서 숨어있다 내려온 수많은 무고한 민간인들이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한국전쟁 발발 직후 이들 수감자는 물론 제주도 내 보도연맹 가입자, 4.3 사건 관련 요시찰자, 입산자 가족 수천 명이 소위 예비검속의 명목 하에 집단 처형되었다. 4.3 사건의 공식적인 종식 시점은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된 1954년 9월로, 소요가 시작된 1947년 3월부터 이 시점까지 7년 7개월에 걸쳐 약 2만 5천에서 3만 명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 4.3 사건은 폭력과 억압으로 점철된 한국 현대사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참사 중 하나로, 당시 제주도 인구의 10분의 1 가량이 사망했고 수십 개의 마을이 사라졌으며, 생존자와 피해자 가족들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연좌제로 인한 제도적 불이익과 사회적 낙인으로 인해 고통 받았다.

이와 같은 제주 4.3 사건의 비극은 이승만 정권 이후로도 오랜 기간에 걸쳐 철저히 은폐되고 왜곡되었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끝난 직후 국회 양민학살사건 조사단이 다른 지역과 함께 제주도에서의 학살에 대한 진상 조사를 개시하였지만 부실한 조사로 인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1961년 5월 16일 군부 쿠데타 발생과 함께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 노력은 중단되었다(김종민 2021). 이후로도 정부 공식 문서에서 제주 4.3 사건은 ‘공산 폭동’으로 통칭되었으며, 이는 제주도에서 벌어진 파괴와 학살을 은폐·축소하고 무고한 민간인의 희생을 공산주의 확산 방지를 위한 노력 과정에서 벌어진 부수적 피해로 간주하는 독재 정권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었다.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통한 언론 및 학술 자유 통제 정책은 4.3의 진실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막았으며, 4.3 사건 이후 지속된 억압적 사회 분위기와 연좌제는 국가 폭력의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빨갱이’로 낙인찍음으로써 이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같은 억압과 통제 하에서도 4.3 사건의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노력은 국내외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계속되었다. 재일 한인 작가 김석범은 1957년 소설 『까마귀의 죽음』을 통해 4.3 사건의 참상을 처음으로 다루었고, 제주도에서 벌어진 비극은 1960년대부터 1990년대에 걸쳐 그가 집필한 대하소설 『화산도』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되었다. 국내에서는 1978년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이 4.3 사건 당시 발생한 제주 북촌리 학살을 정면으로 묘사하여 반향을 일으켰다. 군부 정권은 이를 곧 금지도서로 지정했으나 『순이 삼촌』은 지하 활동가들에 의해 은밀히 유통되며 4.3의 진실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의 물결 속에서 4.3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시민사회와 제주도민들의 노력은 더욱 본격화되었다. 1987년 제주대학교 총학생회가 처음으로 4.3 사건의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제를 치렀고, 1988년 4.3 사건 40주년을 맞아 본격적인 진상규명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듬해인 1989년에는 제주지역 시민사회단체와 서울 제주사회문제협의회의 주도로 제주시민회관에서 처음으로 지역 차원의 공개 추모행사가 치러졌다. 또한 4.3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제주 4.3 연구소가 창립되어 사건을 경험한 이들의 생생한 증언을 채록한 『이제사 말햄수다』1, 2권을 발간하였으며, 제주신문과 제민일보 역시 4.3 사건 생존자 및 목격자들의 증언을 담은 기사를 연재하기 시작했다(고경민 2012).

제주 4.3의 진실과 정의를 찾기 원하는 시민사회의 노력은 1990년대 지역 사회 및 중앙의 정치권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1993년 제주도의회 산하에 첫 공공기구로서 제주 4.3 특별위원회가 설립되었고, 특별위원회는 1995년 5월 처음으로 14,125명의 희생자 명단을 담은 『4.3 희생자 피해 조사 1차 보고서』를 발간하였다. 이와 같은 제주도에서의 노력을 바탕으로 국가 차원에서 진상 조사 및 피해 실태 규명에 나설 것을 요구하는 국회 청원 운동이 개시되었으며,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공약으로 내세운 김대중 후보가 1997년 대선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제주도를 넘어 국가 차원에서의 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98년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함께 여당은 같은 해 3월 당내에 ‘제주도 4.3사태 진상조사 특별위원회’를 구성하는 한편, 5월과 9월, 각각 제주도와 국회에서 4.3 사건에 대한 공청회를 개최했다. 생존자, 피해자 유족 및 제주도 내 시민사회 단체들은 ‘제주 4.3 특별법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를 조직하여 제주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요구했으며, 국내 184개 시민사회 단체가 이에 함께 연대함으로써 국회에서 특별법 제정을 위한 노력은 더욱 탄력을 얻게 되었다((4.3 위원회 2003; 양조훈 2015).

이와 같은 노력의 결과 국회는 여야 합의를 통해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1999년 12월 통과시켰고,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1월 유족 및 시민단체 대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특별법에 서명했다. 통과된 특별법은 (1) 제주 4.3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2) 관련 희생자와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킨다는 두 가지 핵심 목적을 제 1조에 명기하였다. 또한 특별법 통과와 함께 총리실 산하에 신설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약칭 4.3위원회),’ 제주도지사 산하의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실무위원회(약칭 실무위원회),’ 그리고 제주도 부지사, 유족 대표 및 관련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진상조사보고서 작성기획단’이 핵심 기구로서 활동하게 되었다(4.3 위원회 2008).

특별법 통과로 인해 발족된 4.3위원회는 정치적 화해 메커니즘 중 진실위원회 모델을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출범 이후 4.3위원회의 우선 과제는 제주 4.3사건에서 누구에 의해 어떤 일이 벌어졌고 누가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밝히는 일이었다. 2001년 1월 발족한 4.3위원회 산하 진상조사보고서 작성기획단은 전문위원 5명 및 조사요원 15명 등 20명의 상근 진상조사팀을 두고 같은 해 9월 조사에 착수, 2년 6개월에 걸쳐 국내외 자료 수집과 증언 채록에 나섰다. 작성기획단은 조사권한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군경을 비롯한 19개 국내 정부 기관에 자료를 요구해 제출받는 한편, 2001년 7월부터 약 1년 4개월에 걸쳐 503명의 국내 사건 체험자들의 증언을 녹취했다. 또한 조사팀은 미국, 러시아, 일본에 소장된 관련 문서를 입수하는 동시에 미국 및 일본 체류 중인 관련자들의 증언 또한 확보하였다(4.3 위원회 2003).

사건 발생 후 50여년이 지난 후에야 시작된 뒤늦은 조사 개시 시점, 군경의 관련 문서 폐기, 일부 관계자의 증언 거부 등으로 인해 진실을 완전히 밝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으나, 4.3 위원회는 당시 사건이 당시 제주도에서 약 2만 5천에서 3만 명의 인명피해를 발생시켰음을 밝히고 불법적 공권력 행사를 통한 민간인 살상에 대해 정부 책임이 존재한다고 결론지었다(4.3 위원회 2003). 이상과 같은 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4.3 위원회는 2003년 2월 보고서 초안과 함께 (1) 희생자 및 유족들에 대한 정부 사과, (2) 4.3 추념일 지정, (3) 최종보고서의 교육자료 활용, (4) 제주 4.3 평화공원 건립 적극 지원, (5)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유족을 위한 생계비 지원, (6) 집단 매장지 및 유적지 발굴 지원, (7) 추가 진상조사 및 기념사업에 대한 지속적 지원을 그 내용으로 하는 7대 건의안을 총리실에 제출했다(양조훈 2015).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 및 공식 보고서 발간이 제주 4.3의 정의 회복을 위한 중요한 첫 걸음이었다면, 2003년 10월 진상조사보고서 공식 발간 직후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사과는 또 다른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0월 16일 진상조사보고서의 공식 확정 이후 노무현 대통령은 31일 제주도 라마다 호텔에서 4.3 사건 생존자 및 유가족이 함께한 자리에서 “[제주 4.3]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라고 공식 사과하였다(대통령비서실 2004, 478-9). 대통령의 제주 방문에 앞서 청와대 비서진이 유족회 및 관련 시민단체 대표들을 만나 이들의 의견을 취합할 때까지만 해도 많은 피해자 및 유가족들은 대통령이 이렇게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사과할 것으로 예상하지는 못했으며 모호한 형태의 유감 표명 정도가 될 것으로 예상한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피해자 및 유족에 대한 사과와 위로를 건네는 것은 물론,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이라는 명시적 표현을 통해 국가 책임을 명확히 확인하고 인정함으로써 피해자 및 유가족들의 긍정적 반응을 이끌어냈다. 2003년의 대통령 사과는 과거의 인권 유린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 수반 최초의 공식 사과로서, 4.3 사건의 정의 회복은 물론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라 평가된다(Kim 2018).

그 이후에도 4.3 사건의 진상조사와 피해자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6년 국가수반으로서는 최초로 제주 4.3 위령제에 참석하여 참배하고 다시 한 번 제주도민들에게 사과하였고, 2007년에는 특별법 개정을 통해 처음의 4.3 특별법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불법 군법회의 피해자들이 ‘수형자’로서 특별법이 인정하는 4.3 사건의 희생자로 포함되었다. 또한 법 개정과 함께 4.3 평화재단이 설립되어 추가 진상조사, 기념관 및 4.3 평화공원의 운영과 관리를 담당하게 되었다. 또한 4.3위원회가 건의한 국가 공식 추념일 지정은 2014년 박근해 정부 시기 대통령령을 통해 4월 3일이 4.3희생자 추정일로 공식 지정됨으로써 성취되었다.  


  1. 앞으로의 여정 : 배보상 논의와 후속조치

이후 제주 4.3 사건에 대한 우리 사회와 정부의 노력은 진상규명과 정부 사과를 넘어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배·보상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사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제주 4.3 사건과 관련한 희생자, 유가족 및 시민단체 활동의 우선순위는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있었다. 물론 이 시기에도 배·보상을 원하는 이들이 있기는 했으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조치조차 쉽지 않았던 당시 상황 상 배상과 보상의 문제는 이차적 순위의 목표로 여겨졌다(Kim 2014). 기존의 4.3 특별법은 4.3 평화재단이나 평화공원처럼 집단 차원의 간접 지원 방안만이 담겼고, 4.3 피해자 개개인에 대해서는 의료 및 생계비 보조 정도의 간접적 소규모 지원만이 시행되었다. 국가수반에 의한 정부 책임 인정이 공식화되었던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사과에서도 피해자 및 유족에 대한 배상과 보상은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부터 이 같은 흐름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2005년 발족되어 5년여 간 활동한 정부 산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진상규명 내용을 바탕으로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에 대한 유족의 국가배상소송이 이어졌고, 2009년 울산보도연맹사건 희생자 유족의 승소는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제주도에서도 2014년과 2015년 예비검속 희생자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한 집단손해배상 소송에서 승리하면서, 제주 4.3 사건의 다른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소모하는 개별적 소송이 아니라 특별법 개정을 통한 국가 배상이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이재승 2020; 양조훈 2020).이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4.3 유족회와 4.3범국민위원회, 그리고 제주 출신의 국회위원들은 배보상 문제를 포함하는 4.3 특별법 개정을 요구하였고 이에 따라 2019년 12월 특별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으나, 심각한 여야 정쟁으로 인해 법안 통과는 좌초되었다(제주도인터넷신문기자협회 2020).

배보상 문제는 정부차원에서도 중요한 의제로 부각되었다. 2018년 4월 3일 제주 4.3 사건 70주기 추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은 제주 4.3 사건의 비극과 정부 책임을 다시 한 번 인정하며, “유족들과 생존희생자들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조치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보상과 국가트라우마센터 건립 등 입법이 필요한 사항은 국회와 적극 협의”할 것임을 밝힘으로써 제주 4.3 사건의 피해자 및 유족에 대한 치유와 정부의 배·보상 추진 의지를 공식화했다(청와대 2018, 387-8). 문 대통령의 2020년 제주 4.3 추념식 연설은 배·보상 문제를 보다 직접적으로 다루었는데, 그는 “제주 4.3은 개별 소송으로 일부 배상을 받거나 정부의 의료지원금과 생활지원금을 지급받는 것에 머물고 있을 뿐 법에 의한 배·보상은 여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더딘 발걸음에 대통령으로서 마음이 무겁습니다”라고 유감을 표하는 한편, “기본적 정의로서의 실질적인 배상과 보상이 실현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해 나가겠습니다”라고 선언하고 국회에 조속한 4.3 특별법 개정을 촉구했다(청와대 2021, 338-9).

이러한 노력을 통해 마침내 2021년 2월 26일 국회는 추가 진상조사, 희생자 특별 재심 신설과 함께 위자료 등 특별 지원 방안 강구 조치를 담은 4.3 특별법 전면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개정된 특별법은 “국가는 희생자에 대하여 위자료 등의 특별한 지원을 강구하며, 필요한 기준을 마련한다”라는 조항(제 16조 희생자에 대한 위자료 등)을 포함하게 되었는데,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오영훈 의원은 이에 대해 “위자료 개념상 배상의 용어가 담겨 있고 배상의 용어를 정부가 수용했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라고 설명하였다(고성식 2021). “배상”이나 “보상”이라는 명시적 표현이 담기지 않고 “위자료”라는 표현이 사용된 데 대해 여러 유가족 및 관련 시민단체, 지역 언론들이 유감을 표명하기는 하였으나, 개정된 특별법은 처음으로 4.3 피해자 개개인에 대한 직접적 국가 배보상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변화로 보는 시각 또한 존재한다(박정섭 2021).

이후 구체적 희생자 피해 보상 기준 마련을 위한 한국법제연구원의 연구 용역 결과를 바탕으로 2021년 10월 4.3특별법의 보완입법을 위한 일부개정안이 발의되었다(이정민 2021). 발의된 일부개정안은 기존에 논란이 되었던 “위자료”라는 용어 대신 적법행위 뿐 아니라 위법행위로 인한 손해전보를 포함하는 개념으로서 “보상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구체적 보상금액으로는 제주 4.3 사건 시기 통상임금을 기초로 한 일실 이익, 보상 지연, 정신적 고통에 대한 위자료 등을 포함하여 희생자 유형별로 최고 9천만 원을 상정하고 있다(최환용 2021). 다만 이 개정안에 대해서도 “배상”이 아닌 “보상”이라는 포괄적 용어의 사용, 보상금의 지급 대상, 보상금액의 산출 방식 및 적정선, 재산상 피해 보상 누락 문제 등에 대해 논란이 존재하며 관련 논의가 계속 진행 중이다(조수진 2021).

  1. 맺으며

제주 4.3사건은 비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현대사의 비극이었지만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가 정의의 회복을 통한 정치적 화해를 학습할 중요한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은 냉전과 독재정권 시기 변방의 위치에 있던 제주 지역 및 시민사회 단체의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그 동력이 마련될 수 있었으며, 4.3위원회를 통한 진상규명 노력과 국가수반의 사과, 그리고 최근 진행되고 있는 배보상 문제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와 정치권 역시 정치적·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데 있어 느리지만 꾸준한 진전을 보여 왔다. 이제 제주 4.3 사건은 금서를 돌려보며 남 몰래 분노하는 숨겨진 과거가 아니며, 국가지정 추념일을 통해 우리 사회 모두가 기억하고 정규 교육과정 반영을 통해 우리나라 학생 모두가 그 참혹함과 불의함을 배우는, 우리 모두의 역사가 되었다. 이상과 같은 회복적 정의를 위한 노력을 통해 제주 4.3의 피해자와 가족들은 그들을 상처 입히고 탄압했던 우리 사회 및 국가와의 정치적 화해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 우리 사회 일각에선 제주 4.3의 진실을 외면하고 피해자와 유족들의 명예를 폄훼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나오고 있으며 이는 유사한 사건에 대해 수많은 나라가 겪었거나 현재도 겪고 있는 일로, 어두운 과거에 대한 정치적 화해가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의의 회복과 진정한 화해는 과거의 불의와 상처를 단순히 한 두 번의 정치적·사회적 프로젝트를 통해 완결짓고 '졸업'하는 과정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제주 4.3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정의 회복과 화해는 앞으로도 오랜 시간에 걸친 노력과 변화를 요구할 것이나, 그 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는 한층 더 성숙한 평화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에 포함된 의견은 저자 개인의 견해로 제주평화연구원의 공식입장과는 무관합니다.

기획: 유기은 박사후연구원

저자소개

김지은

가톨릭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학사 및 석사를 받았고 미국 노트르담대학(University of Notre Dame)에서 정치학/평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핵심 연구분야는 국제 규범, 인권, 정치적 폭력과 화해이며 현재 미국 이스턴메노나이트 대학교(Eastern Mennonite University) 교수로 정치학과 평화학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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