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의 핵 중상주의: 돈의 색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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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의 나라다. 따라서 경제적 합리성이 일본의 정책방향을 정하는 가장 강력한 동기 가운데 하나이다. 예를 들면, 일본의 우익진영이 1941년 진주만 공격을 루즈벨트 행정부가 내린 연료통상금지 조치에 대한 정당방위적인 행동이었다고 시종일관 주장하는 이유와 같다. 연료는 일본의 전시경제에서는 생명줄과 같은 것이라는 게 우익진영의 주장이다. 역사적으로 궤적을 그리며 되풀이되는 주제가 있다면 미래의 행동을 예측하는 것이 조금은 쉬울 것이다. 2011년 3월 11일 발생한 지진과 쓰나미로 큰 피해와 후유증을 겪는 와중에 나타난 일본 정부의 행태는 또 다시 경제적 타산에 사로잡힌 일본 정부의 현주소를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국민의 반핵 감정이 높아지고 있는 동안에도 일본 정부는 대외적으로 자국의 핵기술을 개발도상국에게 수출하려 하고 있다. 이와 같이 2011년 9월, 일본 국내정치 및 국제적 자금 마련과 관련해서 두 가지 문제가 별개의 것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사건이 있었다.
자국 내에서 일본 정부도 후쿠시마 방사선 누출로 인한 오염에 대하여 국민들의 분노가 끓어오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방사선 누출로 인해 주변 현에 거주하고 있는 8만 명이 대피했고, 내부적으로는 난민의 수가 3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번 지진의 규모는 히로시마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보다 30배는 컸을 것으로 추정한다. 게다가 오염 범위는 체르노빌 참사보다 100배는 넓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후쿠시마 다이이치발전소 지하실에 저장한 오염된 물을 처리하는 데는 1년 이상이 소요될 것이다. ‘청정 에너지clean energy’가 치명적일 수도 있고, 비용이 매우 많이 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국민들은 이제야 깨달았다. 9월 20일, 6만 명 정도 되는 시위대가 도쿄 중심에 모여 정부는 더 이상 핵에너지에 의존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TEPCO와 관련 정부기관의 잘못된 발전소 설립에 대한 국민의 분노를 알려준 것이었다.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떨어진 이후, 유일한 핵폭탄 피해국임과 동시에 핵발전소 분야에서는 전 세계적으로 선두적인 위치에 있는 국가 중 하나가 되었다. 슬프고 역설적인 상황에서 도쿄의 핵 정책은 시작되었다. 후에 총리가 된 젊은 정치인 나카소네 야스히로Nakasone Yasuhiro(1983~87)는 1954년 3월에 평화적인 목적의 핵에너지를 개발하기 위해 2억3,500만 엔의 예산을 책정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이 법안은 역설적이게도 후쿠류 마루(행운의 용)의 선원이 비키니 산호섬의 수소폭탄 낙진에 피폭된 후 일본으로 귀화하던 시기에 맞춰 서둘러 통과되었다. 참치잡이 선원의 방사선 피폭이 전국적으로 반핵 운동을 부채질하는 동안 일본 정부는 은밀한 방법으로 국가정책을 원자력 쪽으로 급선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향력 있는 엘리트들은 전후 재건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에너지 자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1950년대 경제중심적 사고가 3월 11일 핵 재난으로 가는 길을 마련한 셈이다.
9월 23일 노다 요시히코Noda Yoshihiko 신임 총리는 유엔에서 연설을 했다. 유엔 연단에 오른 최초 일본 총리인 노다 총리는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입장과 관련한 문제에 대해 연설을 하면서 후쿠시마 오염물질이 국경과 바다를 넘어 이동하는 상황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속하게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노다 총리의 약속은 누구나 예상한 바였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노다 총리는 일본 정부가 개발도상국에게 원자력 기술을 수출할 수 있는 기회를 계속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일본은 베트남, 터키, 중국, 인도와 대화를 해나가고 있다. 20011년 6월, 일본은 불가리아, 캐나다와 원자력 기술협력을 위한 양해각서에 서명했다.
54기의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통해 기술을 축적한 일본은 에너지 시장에서 확실히 비교우위에 있다. 그러나 잠재적으로 위험한 원자력 노하우를 다른 나라로 판매하는 것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안전하게 에너지를 사용하려는 노력과 별개로 생각되어진다는 것이기 때문에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표면적으로 원자력 노하우는 에너지 기술일 뿐이다. 그러나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경험을 통해 다른 에너지 자원과 비교해 보면 파괴적인 후유증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술에 도덕적 가치가 따르지 않는다면 원자폭탄은 폭탄일 뿐이다. 원자폭탄은 그 파괴력이 무자비하기 때문에 더욱 도덕적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쟁은 인권존중과 인간안보의 진보와 관련된 문제다.
경제를 정치에서 분리시키는 것은 일본에서는 새로운 일이 아니다. 패망 후 평화협정을 맺은 일본은 한국전쟁을 기회로 삼아 군수품을 제조하여 전쟁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재건할 수 있었다. 또한 일본은 유엔기를 달고 한반도에 군인을 파견했다. 상호안전보장조약을 맺어 견고한 동맹국이자 협력자관계에 있는 미국이 걸프 전쟁을 치르고 있을 때 일본은 자위대가 아니라 돈을 보내 미국의 권위자들에게 ‘수표책 외교checkbook diplomacy’라는 냉소적 평가를 받기도 했다. 경제와 정치 사이에서 완급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전술적으로 획기적인 방법을 선택하고 기민하게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이에 있어 일본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국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자국민의 의심쩍어 하는 시선을 피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배상계획은 운송과 분배 문제 때문에 재난 피해자들의 저항에 직면하고 있다. 150페이지의 지침서가 첨부된 60페이지의 배상청구양식은 이재민을 좌절시킨다. 피해자 가운데 일부는 이재민이 배상요청서를 작성하지 못하도록 정부가 의도적으로 절차를 복잡하게 했다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한다. 또한 방사능 피폭의 영향이 오래 남는다는 점을 고려해 지금 보상을 받는 것을 주저하는 피해자도 있다. 하지만, 정부는 명확한 보상절차를 단번에 처리하려고 할 것이다.
세계적인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Murakami Haruki는 일본을 ‘희망 없는 부자 나라’라고 묘사했다. 부는 양적 개념인 반면 희망은 도덕을 형이상학적으로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돈은 색이 없지만, 여러 다양한 상황을 만들어 낼 수는 있다. 이처럼 부의 상황은 돈을 우대해야 하는지, 경멸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
온정 자본주의 시대인 오늘날 일본은 부를 창출하는 방식을 더욱 선별하여 자국의 도덕적인 리더십을 증명해 보일 필요가 있다. 원자력 기술을 수출하는 문제는 히로시마와 후쿠시마의 후유증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부를 축적한다는 명분이 있더라도 모두가 인정할 만한 방법은 아니라고 본다. 국제사회는 원자력발전소와 원자력 무기의 사용을 줄여 더 안전한 사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글에 포함된 의견은 저자 개인의 견해로 제주평화연구원의 공식입장과는 무관합니다. * 現 일본 히로시마시립대학교 및 히로시마 평화연구원 부교수. 미국 조지아대학교에서 여성학 석사 및 사회학 석·박사(1998) 학위 취득. 미국 조지아대학교 세계문화연구소 연구위원(1999) 및 미 국무부 주한미국대사관 전문위원(2000~2004) 역임. 공편 『아시아의 역사와 기억』(Palgrave Macmillan Publishers, 2010) 외 미국, 일본, 한국에서 50여 편의 연구논문 출판. 현재 재미한국정치연구회와 세계정치학회 이사 및 North Korean Review 공동편집장으로 활동하고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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