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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 과정이 한반도에 주는 교훈과 한계
등록일
2014-11-11
조회수
8

  베를린 장벽 붕괴 25주년을 맞아 국내에서는 독일 통일 과정에서 한반도 통일의 교훈을 찾자는 논의가 부쩍 많아졌다. 이러한 움직임은 사실 오래전부터 조금씩 있었다. 국내외 연구자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있는 통일의 기제가 무엇이었느냐에 대한 내용을 종합하면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독일 통일은 착실한 준비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이는 동·서독 당사자 간의 노력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1951년의 베를린 협약, 1970년의 동서독 첫 정상회담, 1972년의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등의 과정을 거쳤다는 점이 강조된다. 보다 엄밀히 보자면, 1969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가 취임 연설에서 동·서독 정상회담 추진을 제안하였다는 사실과, 이어서 양쪽 정치지도자들이 정파를 초월하여 7차에 걸친 정상회담을 여는 등 개인적 의지가 중요했다는 것이다. 둘째, 동서 냉전의 종식으로 독일 통일이 실천적으로 급격히 이루어질 조건이 갖추어졌다는 것이다. 체계(구조)적인 설명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소련의 붕괴가 기존 체제에 강력한 변화를 이끌었으며 이로 인해 지역 국가였던 동·서독이 통일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는 것이 강조된다. 이러한 관점은 대부분의 연구자가 동의하고 있다. 셋째, 전후 유럽국가 간의 꾸준한 교류와 확대는 그들 간 상호의존성을 증대시켰고, 동·서독 통일은 이런 가운데서 주변국들의 우려를 불식시키며 형성된 신뢰 속에서 가능하였다는 것이다. 앤드류 모라비치(Andrew Moravcsik 1998)는, 프랑스가 독일의 통일을 반대하는 입장에서 암묵적 지지 입장으로 돌아선 이유로, 서독이 마르크화를 포기하고 유로화 도입을 받아들이겠다는 콜-미테랑 합의가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마르크화는 고평가 되어있어서 서독기업들이 수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따라서 마르크화의 포기는 독일 수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업인들의 요구도 한몫 하였다고 본다.

  이러한 독일 통일의 기제와 변수들은 지금의 한반도와 비교할 때 어떤 교훈을 주는가?

  먼저 체제 변수로 보자면, 21세기 한반도와 동북아시아 상황은 1990년대 초 동·서독의 통일 상황과 비교할 때 보다 훨씬 복잡하다. 근대와 탈근대, 부상하는 중화질서와 구 냉전질서, 탈식민지 과정 등이 여전히 서로 얽혀있다. 다시 말해, ‘냉전질서(미국-북한, 한국-북한, 한국-미국)’, ‘식민지 질서의 잔재(한국-일본, 중국-일본)’, ‘중화질서의 부상(중국을 둘러싼 동아시아)’, ‘포스트모던질서(각종 FTA, ASEM, APEC 및 기타 다자주의)’ 등이 중첩되어있다. 한반도는 이러한 복합적·중첩적 체제에서 균형의 줄타기를 하고 있다. 냉전 체제에서 각 블록의 일원이었던 동·서독과는 분명 다른 위치에 있다.

  둘째, 국가 차원에서 보자면,  ‘중국의 부상’, ‘미국의 동아시아 회귀’, ‘일본의 쇠퇴’, ‘러시아의 극동 관심 상승’. ‘북한의 핵/장거리 미사일 개발’ 등이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각국의 질서는 FTA 등을 매개로 한 지역주의와 해양 영유권을 비롯한 영토 분쟁의 불씨를 담고 있는 지정학적 긴장감이 병진하고 있다. 동·서독 통일은 유럽연합이라는 ‘지역주의’가 무르익는 가운데, 통일에 가장 강력한 반대국가였던 프랑스를 비롯한 주변국들에게 서독이 강력한 인센티브를 제시하였다는 점이 유효했다. 관념적인 신뢰뿐 아니라, 유로화 도입 같은 물질적 선물도 하나의 축이었다. 셋째, 남북 당사자 간의 개인적 차원은 어떠한가? 남북 정치지도자들은 1972년 7.4남북 공동 성명 이후, 다양한 접근을 시도하였다.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도 이 가운데 포함된다. 동·서독의 경우 무려 7차례의 정상회담이 진행되었다. 비공식 정상급 접촉도 6차례 이른다. 대부분의 회담이 냉전이라는 체제 변수 속에서 소련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지만, 만남은 꾸준히 지속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에서 변화의 고리는 있는가?

 
  냉전 시기와 비교해 볼 때 현재 동아시아의 체제차원의 변수는 의외로 불안정하다. 지정학이라는 공간변수에 기억과 잔재, 미래라는 시간변수가 더해져서 보다 복잡해졌다. 냉전이라는 단일 체제의 붕괴 속에서 통일 과정이 가속화된 독일의 예와 비교해서 볼 부분이다. 복잡하기에 미세한 하나의 균열이라도 붕괴로 이어질 가능성은 훨씬 크다. 중첩된 이러한 체제 중 어느 하나라도 붕괴하는 시점이 한반도의 정치 질서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국가차원의 변수에서는, 미국과의 양자동맹은 유지하면서 동아시아 주변국들과의 다자관계의 설정을 확대 심화해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안고 있다. 양자관계와 다자관계의 충돌은 특히 안보 차원에서 더 많은 고민을 가져다준다. 다자주의를 통해 지정학적 긴장감을 줄이고 지역주의 정서를 뿌리내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각 국별 양자 관계에서 내놓을 수 있는 선물이 무엇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개인적 차원에서 볼 때, 한반도의 정치지도자들은 여전히 교착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체제나 국가 차원에 비해서 개인적 차원의 변수는 상대적으로 변화하려는 자율성이 강하다. 주어진 시간 안에 역량을 효율화시킬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 관찰되는 개인적 변수는 체제적, 국가적 차원의 변수보다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냉전 붕괴 직전에 열린 1987년의 콜-호네커 회담이 비교적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간접적으로는 미소 관계의 호전에 바탕을 두고 있었지만, 브란트-슈미트(1969-1982)로 이어지는 사민당의 대동독 정책의 기조를 기민당이 계승하는데 콜 총리의 거부감이 적었다는 점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독일 통일은 지역주의 성장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독일 통일 후 유럽연합은 회원국 수가 급격히 늘었으며, 제도적으로는 경제 공동체에서 정치 공동체로 비약적 발전을 도모할 만큼 성숙되었다. 이미 유럽은 더 이상 지정학적 긴장감은 우려하지 않아도 될 만큼 지역주의가 성장하였다. 독일 통일은 민족 간의 통합을 넘어 지역에 대한 공헌이 컸기에 가치가 크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기억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現 제주평화연구원 연구위원. 브뤼셀 자유대학교에서 정치사회학 박사 학위취득. 주요 논문으로 "국제정치학에서 주체물음(2013)", "유럽연합의 개발협력전략(2013)"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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