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 패러독스(Asia Paradox)와 한일 간 국가정체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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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註] '차세대의 목소리'는 젊은 세대의 신선한 시각을 통해 평화와 안보문제를 살펴보고, 갈등해소와 평화정착을 위한 새로운 방안을 논의하는 JPI PeaceNet의 기획 시리즈입니다. '차세대의 목소리' 기획 시리즈의 발간을 계기로 평화와 협력을 위한 진지한 대화가 차세대와 기성세대 사이에서 시작되기를 기대합니다. 편집자:한인택 연구위원( ihan@jpi.or.kr )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에 관한 논의는 안보적 차원에서의 군사적 균형이나 경제협력, 통합을 통한 분쟁 억제에 관한 논의가 주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최근 동아시아에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역사문제에 대해 ‘아시아 패러독스’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이론적으로 관계 호조 요소로 간주되는 동아시아 각국 간 경제협력의 심화에도 불구하고, 역사인식의 차이로부터 오는 갈등을 의미한다. 물론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국가 간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기본적인 것이며, 경제협력을 통해 공통이익을 증진해 가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러나 아시아 패러독스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러한 조치들만으로는 상이한 역사인식의 충돌로 인한 불신은 계속될 것이며, 비록 이것이 심각한 군사적 분쟁으로 이어지지는 않을지라도 동아시아 국가들 간의 협력 증진은 어렵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동아시아 정세를 바라보면서 유럽이 정치적·경제적 통합을 통해 회원국들 간의 전쟁 가능성을 희석시키고 지역평화를 이룩한 점을 언급하며, 동아시아가 추구해야 할 하나의 모델로 유럽연합의 지역통합 조치를 든다. 물론 유럽연합은 나름의 문제들을 직면하고 있으며, 유럽연합 형성 시기에 유럽 각국이 처해 있던 환경과 현재의 동아시아의 환경이 다르므로, 이를 단순히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하지만, 반드시 유럽연합 방식의 통합이 아닐지라도 보다 심화되고 제도화된 동아시아의 정치적·경제적 통합이 모든 동아시아 국가들의 이익에 부합하며, 지역정세 안정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는 이들이 많다. 한편, 지역통합 노력이 동아시아에서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역사문제로 인해 각국 간 관계가 악화되어 협의가 어려웠다. 이렇듯 지역통합 등 다양한 이슈들은, 잘 알려져 있지만 잘 이해되고 있지는 않은 ‘역사문제’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문제의 해결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이를 ‘관리’하며 국가 간의 관계를 증진하려 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이는 임시방편으로, 항상 문제가 불거질 여지를 남겨놓는 것에 불과하다. ‘역사문제’는 흔히 한일이나 중일 간의 역사인식 차이로부터 생기는 문제로, 국가정체성의 충돌로 발생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관련국들의 국가정체성에 관한 고려 없이는 이 문제의 해결은커녕 제대로 된 이해조차 불가능하다.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력이나 경제관계만이 아닌, 독립요소로서 ‘역사인식’이 각국, 그리고 이들의 국가정체성에 있어서 무엇이기에 이처럼 중요시되고 국가 간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지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국가정체성 분석에 있어 어려운 것은 ‘국가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 것인가이다. 이에 관해서는 다양한 접근법이 있지만, 이 글에서 필자는 국가정체성을 '일국이 추구하는 국가적 이상과 그 이상이 설득력 있고 논리적으로 타당하기 위한 구성요소들' 이라고 정의하겠다. 물론, 국가적 이상이라는 것은 한 사회에 다양하게 존재하며, 사회의 변화와 각 시기의 정치구도에 의해 각 이상들 간의 중요도 및 우선순위가 변할 수 있다. 또한, 국제정세 등 외부적 요인들에 따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구성요소들 역시 변형 혹은 타협될 수도 있다. 따라서 국가정체성을 고려하기 위해서는 각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국가적 이상, 그 이상들을 추구하는 정치세력들 간의 역학구도, 그리고 국제정세에 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이 모든 것을 논하기보다는 한국과 일본의 국가정체성을 중점적으로 역사갈등과 지역통합의 가능성을 다루고자 한다. 한국에서 가장 강력하게 인식되는 국가적 이상은 ‘통일’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통일’이라는 이상은 단지 기술적으로 남한과 북한이 정치적 통일을 이루는 것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발생될 것으로 기대되는 안보상황 개선, 경제성장 기회, 아시아 대륙과의 진정한 연결, 국력증강 등의 다양한 이상을 포함한 개념이다. 통일이라는 이상을 유지하는 데는 여러 요소들이 있지만, 이 중 한일 간 역사문제와 관련되는 것은 ‘미완의 광복’으로서의 통일이다. 한국에서는 8월 15일을 광복절, 즉 일제로부터 독립을 기념하는 날로 의미를 부여하는 반면, 일본은 이 날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종전기념일로 여긴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는 한국인들의 식민지 경험이 부정적이었다는 것을 인정한 적은 있어도, 단 한 번도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화한 행위의 정당성을 부정한 적이 없다. 조선의 식민지화가 부당한 것이 아니라면, 광복절이 갖는 의미는 퇴색된다. 한국의 독립은 본래 있어야 할 정당한 ‘빛’이 복원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강대국들 간 힘의 논리에 인해 부수적으로 생산된 ‘우연’일 뿐이게 되는 것이다. 만약 독립에 국가적 의미가 없고 단지 우연일 뿐이라면, ‘미완의 광복’은 없으며, 한국은 굳이 애써서 통일을 지향할 의미가 없어진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은 이미 한일합병 당시에 독자적인 국민국가(nation state)이기를 포기하여 정당하게 일본의 일부가 되었던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대한민국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통일이라는 이상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광복’의 의미가 참이어야 하며, 한일합병이 부당했던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 현재 대중적으로는 헌법 9조에 기초한 “평화국가”로서의 국가정체성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지만, 아베 총리를 위시한 정치지도층의 일본의 명예를 중시하는 이상이 점차 평화국가 정체성을 개조하려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자랑스러운 일본’을 국가적 이상으로 인식하고 있는 현재 일본의 정치지도자들에게 있어 한일합병의 부당성을 인정한다든가 위안부 문제 등의 만행을 인정하는 것은 그들의 ‘자랑스러운 일본’을 모독 내지 부정하게 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와 같이, 현재 한일 간의 갈등은 국가정체성 충돌의 결과로 볼 수 있다. 한국에게 있어 과거의 일본제국을 부정하는 것은 현재 구축된 국가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반면, 일본에게 한국의 국가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은 일본이 추구하고자 하는 ‘자랑스러운 일본’이라는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인식된다. 또한, 이러한 한국과 일본의 국가정체성은 상당히 폐쇄적인 성격을 보인다. 양국 모두 자국의 이상만을 추구하며, 그러한 이상 추구가 다른 국가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다. 다양한 국가들로 이루어진 동아시아 지역에 대한 이상을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이는 ‘국가’는 단순히 영토로 지정된 하나의 공간이 아니라 국민(nation)의 운명공동체라는 유기적 인식이 있는 반면, 동아시아지역의 경우, 이러한 유기체들이 존재하는 무기체적 공간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이러한 국민국가(nation state) 중심적 인식이 폐쇄적인 국가정체성의 근원이며, 나아가 역사문제, 그리고 여타 국가 간 갈등의 요인이라면 이를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한편, 이러한 인식의 대안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운명공동체로서 동아시아라는 지역을 인식하여 지역이상, 나아가 지역정체성을 형성해, 이를 각국의 국가정체성을 견제하는 요소가 될 수 있게끔 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한·일을 포함한 동아시아 각국의 국민들이 자국의 국가정체성에 대해 건전한 의심을 품어보고, 타국의 국가정체성을 이해하는 한편, 운명공동체로서 동아시아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한 시도로, 한국의 ‘진정한 광복’ 추구와 일본의 ‘자랑스러운 일본’이라는 이상을 조화시키는 방법을 탐구해보는 것을 들 수 있다. 각국의 국가정체성에 대한 고려 없이는 지역평화와 협력을 위한 그 어떤 조치도 또 다른 충돌이 발생하기 전까지의 미봉책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석사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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