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독 사례에 비추어 본 북한 급변 사태 발생 가능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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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정권 출범과 장성택 처형 이후 북한 급변 사태에 대한 논의가 더욱 자주 대두되고 있다. 북한 급변 사태에 큰 관심을 가지는 것은 과거 동독주민의 대규모 탈출과 시위 확산이 동독 공산정권의 붕괴와 독일통일의 계기가 됐다는 점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제까지 우리 사회에서의 북한 급변 사태 관련 논의를 보면 급변 사태 대비책 강구에 초점을 두고 있어 급변 사태 발생 가능성에 대한 연구는 매우 소홀한 것 같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동독 사례에 비추어 북한에서의 급변 사태 발생 가능성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북한 급변 사태의 정의와 유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의들이 있으나 이 글에서는 경제악화 등으로 대규모 탈북자가 발생하는 경우와 군부 쿠데타나 대규모 주민봉기로 북한지역이 무정부적 혼란 상태에 빠지는 경우에 대해서만 논의하고자 한다. 이 두 가지 유형이 가장 발생 가능성이 높을 뿐 아니라 다른 사태들도 대부분 이 둘과 연결되어 발생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동독에서의 급변 사태: 동독주민의 대규모 탈출과 시위 열풍 1989년 7월 이후 시작된 동독주민의 대규모 탈출 및 시위 열풍은 동독 공산정권의 붕괴와 독일통일의 계기가 되었다. 먼저 동독주민의 대규모 탈출 사태의 경우, 1989년 5월 헝가리 개혁정부가 개혁 의지를 표출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철조망을 제거하자 매일 2,000여 명의 동독주민이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으로 탈출함으로써 동독주민의 대규모 탈출이 시작됐다. 이어 11월 9일 여행 규제 완화 계획을 발표하던 공보 담당 정치국원 샤보프스키가 실수로 “지금부터 국경을 개방한다” 발표함으로써 베를린장벽이 붕괴되자 대규모 탈출이 본격화되었으며, 1989년 7월부터 이듬해 6월 말까지 서독으로 탈출한 동독주민이 58만여 명에 달했다. 이렇게 하여 동독사회는 마비되기 시작했고, 주민들은 시위 열풍에 휩싸여 결국 동독 공산정권의 붕괴와 독일통일을 촉발하게 되었다. 탈출 열풍은 시위 열풍으로 이어졌다. 떠나지 않고 남은 사람들이 개혁을 요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시위 열풍은 1989년 9월 4일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에서 월요예배 후 시작된 촛불시위가 계기가 됐다. 소규모로 시작된 촛불혁명은 9월 10일 동독 첫 번째 민권 단체인 ‘신광장’이 출범한 이후 여러 민권 단체들이 결성되고 이들이 시위를 주도함에 따라 전국 규모로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10월 16일 라이프치히 시위에 12만 명이 참여하는 등 대규모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10월 18일, 19년간 동독을 통치해 온 호네커 서기장이 물러나고 개혁파로 알려진 에곤 크렌츠가 서기장으로 취임했다. 크렌츠는 정치국 보수세력들을 제거하는 등 일련의 개혁조치를 취했으나, 시위는 더욱 확산되어 11월 4일 동베를린 시위에는 동독 역사상 최대 규모인 100만 명이 참여했다. 그 와중 11월 9일 베를린장벽이 붕괴되자 동독 전체가 탈출과 시위 열풍에 휩싸이게 되었고, 12월 3일에는 크렌츠 서기장, 정치국원 및 당 중앙위원이 전원 사퇴했다. 12월 8일에는 사회주의통일당(SED)이 특별전당대회를 개최, 스탈린주의와 일당 지배체제의 포기를 선언하고 당명을 ‘사회주의통일당-민주사회당(SED-PDS)’으로 개칭함으로써 40년을 지탱해 온 동독 공산정권이 일시에 붕괴되었다. 사회주의통일당을 대신해 국정 운영을 담당하게 된 ‘원탁회의’가 사태 수습을 위해 다음 해 5월 6일 자유선거를 하기로 약속함으로써 동독의 ‘평화혁명’이 이루어질 수 있었고, 1990년 1월에는 시위군중이 비밀경찰(Stasi) 본부에 난입하는 등 무정부 상태가 지속되어 동독정부는 사실상 와해되었으며 동·서독은 평화통일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동독주민의 대규모 탈출이 가능해진 배경 동독주민의 대규모 탈출이 가능했던 배경은 다음 다섯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동독주민이 대규모로 탈출할 수 있는 ‘탈출로’가 있었다는 점이다. 동독주민의 동유럽 여행이 자유로웠던 데다 헝가리, 폴란드, 체코에 개혁정부가 들어서 탈출에 협조적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1989년 8월 서독 콜 총리가 비밀교섭을 통해 10억 마르크의 차관 지원을 약속한 후 헝가리정부가 동독과의 여행협정을 파기하고, 동독주민의 탈출을 허용토록 함으로써 헝가리를 통해 매일 2,000여 명의 탈출이 가능해졌다. 둘째, 서독이 동독주민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됐다는 점이다. 서독은 선진적 민주제도, 풍요로운 경제, 평등한 분배로 평소 동독주민들이 서독을 동경하게 된 데다 동·서독 간의 빈번한 교류로 동독주민들이 서독사회 정착에 두려움을 갖지 않았다는 점도 탈출 욕구를 자극하는 요인이 되었다. 셋째, 탈출 사태 초기 동독정부가 안이하게 대처했다는 점도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당초 동독 공산정권은 동독주민들이 ‘사회주의 최고의 복지국가’인 동독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 데다 대규모 탈출 사태가 지속되면 서독정부가 이들의 입국을 제한하거나 동독에 대규모의 경제지원을 하여 탈출 사태를 진정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호네커 서기장이 10월 7일 동독정권 수립 40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개최하기 위해 폴란드, 체코 주재 서독대사관에 피신해 있던 동독주민 수천 명의 서독 행을 허가함으로써 탈출 열풍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가 되었다. 넷째, 동독주민들이 소련의 정책이 다시 강경노선으로 바뀌어 소련이 동독 사태에 적극 개입할 가능성을 우려했다는 점이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동독주민의 탈출 사태에 개입할 의사가 없었고, 내부적으로는 보수세력의 반발로 집권기반이 몹시 흔들리고 있었다. 따라서 동독주민들은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정책이 추진되는 동안 빨리 서독으로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다섯째, 서독정부가 큰 어려움에도 불구, 동독 탈출민을 전원 수용했다는 점이다. 1989년 8월 이후 동독주민의 대규모 탈출이 본격화되자 동독과의 화해·협력체제 손상을 우려한 사민당(SPD)과 동독주민의 수용 책임을 맡게 된 서독 각 주들이 동독 탈출자의 수용 제한을 강력하게 요구했으나 콜 총리가 동독 탈출자 전원 수용 방침을 고수함으로써 동독주민의 대규모 탈출이 가능하게 되었다. 동독주민의 시위확산과 공산체제의 붕괴 배경 첫째, 서독 TV의 촉매역할로 시위 확산의 급속한 확산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시위 초기 동독주민들은 소련의 개입이 두려워 시위 참여를 주저했으나, 서독 TV를 통해 소련이 무력개입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한, 서독 TV 보도를 통해 각 지역에서의 시위 상황을 생생하게 목격하게 되자 적극적으로 시위에 나서게 되었다. 둘째, 소련의 반대로 시위의 유혈진압이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동독시위의 유혈진압이 미·소간의 화해체제를 손상시키고 동독주민의 소련군 기지에 대한 공격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시위 초기부터 동독정부에 시위의 무력진압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명확히 전달했다. 더욱이 동독군은 바르샤바조약군의 일원으로 소련군의 통제 하에 있어 소련의 반대를 무릅쓰고 병력 동원을 하기 어려웠다. 결국 동독 공산정권의 중요한 버팀목이 돼 온 소련이 지원을 철회하자 동독 공산정권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셋째, 동독정부의 시위 대책이 매우 미흡했다는 점이다. 1953년 동베를린 노동자 봉기가 200여 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소련 탱크에 의해 무참히 진압된 후 동독에서는 주민시위가 거의 없었다. 더욱이 1989년 10월 대규모 시위 사태 발생 후에도 대부분의 동독지도자들은 소련이 버티고 있는 한 동독 공산정권이 붕괴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시위 대비 태세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따라서 9월 초 소규모로 시작된 촛불시위가 급속히 전국 규모의 시위로 확산되자 동독정부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넷째, 교회라는 구심점이 있어 시위가 급속히 확산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독일은 기독교 전통이 강해 평소 동독정부는 교회활동에 관대했다. 따라서 교회와 종교지도자들이 민권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고, 시위 시 교회가 집결장소가 되고 전국적인 연결망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시위의 급속한 확산이 가능했다. 다섯째, 동독 공산정권에 강력한 체제수호 의지를 가진 지도자가 없었다는 점이다. 당시 동독지도부는 개혁문제로 분열되어 있었고, 공산간부들도 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정치국원들은 모든 책임을 19년간 집권한 호네커가 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소련이 시위의 무력진압에 반대하자 목숨을 걸고 체제를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지도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여섯째, 동독주민들이 자유에의 갈망과 민주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프랑스혁명 이후 유럽인들의 의식 속에는 자유, 평등, 박애 사상이 뿌리내리고 있었고 동독혁명이 일어난 1989년은 프랑스혁명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더욱이 많은 동독주민들은 14년 간 바이마르공화국에서 민주제도를 경험한 바 있고 인접국인 폴란드, 헝가리, 체코, 루마니아에서는 이미 탈공산혁명에 성공해 동독주민들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따라서 소련의 통제가 완화되자 자유를 향한 열망이 폭발적으로 분출될 수 있었다. 일곱째, 동독경제가 파탄 상태에 있어 누구도 동독을 유지해 나갈 자신이 없었다는 점이다. 1972년 호네커정부 출범 이후 동독정부가 서독과 과도한 복지 경쟁을 하다가 성장 잠재력이 대폭 잠식된 데다 1980년대 전자산업 투자가 실패해 1980년대 말에는 심각한 경제위기에 봉착했다. 외채가 200억 달러에 달해 매년 외화수입의 62%를 외채원리금 상환에 사용해야 했고, 매년 서독으로부터 150억 마르크를 지원 받지 못하면 주민의 생활수준을 30% 이상 낮추어야 할 상태였다. 따라서 동독 공산정권 지도부는 물론, 시위를 주도한 민권세력들도 동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주민의 대규모 탈출이 가능한가? 동독과는 달리 북한은 주민의 대규모 탈출을 위한 탈출로가 없고, 대규모 탈출을 감당할 유인이 없다. 또한, 탈출 동기가 미약한 반면, 탈출을 억제하는 요인은 상당하다. 마지막으로, 한국정부의 북한주민 수용능력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북한주민의 대규모 탈출 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희박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를 보다 상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주민의 대규모 탈출이 가능한 통로가 없다. 북한주민의 탈출로는 중국, 러시아 및 해상 탈출 등 세 가지 통로로 제한되어 있는데, 북한주민의 중국 및 러시아 여행은 어렵다. 중국의 경우 국경경비 강화로 소규모 탈출이 어렵고, 러시아는 국경 접근로가 협소해 접근이 어려우며, 해상 탈출로는 선박이 부족으로 활용하기 어렵다. 둘째, 북한주민이 일시에 대규모 탈북을 감행해야 할 유인이 없다. 중국이 헝가리처럼 국경 개방을 할 가능성도 없고, 소위 ‘고난의 행군’ 시기의 경험에 비추어 경제난이 대규모 탈출 동기가 될 가능성이 적으며, 남한이 북한주민의 강력한 동경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동독주민들에 비해 북한주민들의 탈출 동기는 미약한 반면, 탈출 억제 요인은 훨씬 강하다. 북한과 중국의 경비 강화로 북한 주민들은 북한 탈출 성공을 확신하기 어렵고, 실패 시 가혹한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또한, 성공해도 잔류 가족과 한국으로 탈출한 이후의 생계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넷째, 한국정부가 대규모로 탈출한 북한주민을 모두 수용하기는 어렵다. 북한주민의 탈출이 북한정권에 치명적 타격을 주기 위해서는 연간 탈출자의 규모가 수만 명 수준은 돼야 하나 우리의 수용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더욱이 위기에 처한 북한정권이 탈북자들 틈에 공작요원을 투입하여 대규모의 테러, 폭파, 소란 행위 등을 획책할 경우 상황은 더욱 어려워지게 된다. 북한에서의 무정부적 소요 사태 발생이 가능한가? 동독과는 달리 북한은 주민들의 민주주의 경험이 전혀 없는 데다 오랫동안 억압통치에 순치되어 있어 저항의식이 매우 낮다. 그리고 교회와 같은 반체제활동의 구심점이 없을 뿐만 아니라 교통·통신·방송망의 미비로 시위 확산이 어렵고, 과거 소련과 같이 시위의 유혈진압을 할 억제할 수 있는 외부세력이 없다. 더욱이 북한 내에 강력한 체제수호 세력이 존재하고 있고, 경제적 궁핍이 민중봉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적다는 점 등에 비추어 동독에서와 같은 대규모 시위 사태나 무정부 상태가 야기될 가능성은 희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상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주민은 민주주의 경험이 없어 민주의식이나 체제저항 욕구를 가지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북한주민들은 프랑스혁명과 바이마르공화국을 경험한 동독주민들과는 사고가 전혀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북한주민은 외부 정보에 철저히 차단되어있고, 오랜 세뇌교육과 가혹한 억압통치로 김일성일가의 세습체제에 순치되어 있다. 그로 인해 탄압정치, 집권층의 부패 및 경제적 궁핍이 체제저항 의식을 촉발할 가능성은 희박할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북한에는 반체제활동을 주도할 구심점이 없다는 점이다. 북한정권이 김일성 세습체제 반대세력이나 잠재적 도전세력을 철저히 제거하여 반체제세력의 형성 자체가 어렵다. 또한, 어느 누구도 체제저항 운동의 성공 가능성을 확신하기가 어렵고, 동독과는 달리 전국 규모의 종교조직도 부재하다. 그리고 대학생 등 영향력 있는 젊은 세대 역시 대부분 수혜계층 출신이어서 대규모 시위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셋째, 북한은 폭발적 시위 확산이 매우 어려운 여건이다. 교통·통신 시설의 불비와 북한정권의 철저한 정보통제로 어느 한 곳에서 시위나 소요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타 지역으로의 확산 없이 단발성으로 끝날 가능성이 많다. 동독 시위 시에는 서독 TV가 확산의 촉매역할을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북한에서 시위 확산이 어렵다는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넷째, 북한정권이 유혈진압을 포기토록 강제할 수 있는 외부세력이 없다는 점이다. 중국의 영향력도 매우 제한적인 데다, 천안문 사태에 비추어 시위의 유혈진압 방지를 위해 노력할 가능성이 적다. 또한, 북한경제의 대외 의존도가 낮아 외국이나 국제기구가 영향을 미치기도 어렵다. 따라서 일부 지역에서 소요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초기에 무자비하게 진압될 가능성이 많다. 다섯째, 동독과는 달리 북한에는 강력한 체제수호 의지를 가진 집단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만경대학원 출신, 북한정권의 수혜계층 50만 명과 그 가족 등 총 200여만 명의 적극적 체제수호 세력이 있어 동독처럼 쉽게 무너질 가능성이 적다. 군부 반란이나 김정은 사망이 급변 사태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할 수도 있으나, 북한 집권층이 과거 동독 고위층의 몰락과정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고, 남한의 흡수통일을 두려워하고 있어 북한 내부에 정변이 발생해도 정권교체만 이루어질 뿐 무정부 상태로 발전할 가능성은 희박할 것으로 생각된다. 차후 정책 방향 1993년 김영삼정부가 김일성 건강 악화설을 계기로 북한 급변 사태 대비책 논의를 시작한 이후 북한 급변 사태 문제는 오랫동안 우리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어 왔다. 특히 최근에는 북한 급변 사태에 대한 연구가 봇물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북한 급변 사태 논의의 배경을 보면 북한 급변 사태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성 보다는 북한 급변 사태 발생으로 통일의 기회가 의외로 빨리 도래할 수 있다는 낙관론이 짙게 깔려 있음을 느끼게 된다. 더군다나 최근 “통일의 기회는 도둑고양이처럼 찾아올 수 있다”는 이야기는 통일대박론과 맞물려 낙관적인 통일론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북한주민의 대규모 탈출이나 북한 내부의 정변 발생으로 우리가 기대하는 급변 사태가 발생하거나 통일의 기회가 도래할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북한 급변 사태에 대비는 하되, 급변 사태가 통일의 길을 열어줄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버리고, 통일에 도움이 될 일은 하나라도 더 보태고 통일에 장애가 될 일은 하나라도 더 줄여나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특히 이를 위해서는 김일성 일가 세습체제의 변화 및 붕괴 촉진, 북한주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인도적 지원의 강화, 북한주민에 대한 외부정보의 전파 확대, 북한 장마당의 확산 등을 꾸준히 추진하는 것이 통일을 위한 올바른 접근법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現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 초빙교수.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 청와대 정책비서관, 주독일대사관 공사, 국제문제조사연구소 부소장, 국가정보원 1차장,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을 역임함. 주요 연구분야는 안보 및 통일정책, 국가정보, 독일통일 등이며 저서로는 "독일통일의 과정과 교훈"이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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