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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I PeaceNet] 2025년 아세안 의장국 말레이시아를 주목할 이유
등록일
2025-01-15
조회수
9

[기획자 註]

최근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ASEAN의 영향력과 중요성이 하락하고 있다는 우려가 ASEAN 안팎으로 제기되는 가운데 오는 2025년에는 말레이시아가 의장국을 수임할 예정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고는 ASEAN이 현재 당면한 과제들을 분석하고, 이에 대해 말레이시아가 자신의 대외정책 특징인 헤징 전략을 ASEAN에 접목시킬 가능성을 논의하면서 이에 따른 정책적 함의를 도출해보고자 한다. [기획: 강영훈 원장(yhkang@jpi.or.kr)]
 



2025년 아세안 의장국(ASEAN Chair)은 말레이시아가 맡는다. 최근 수년간 아세안은 다양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대외적으로 계속 강도를 더하는 미국과 중국 사이 전략 경쟁의 한 가운데 아세안은 던져져 있다. 개별 동남아 국가 차원에서, 그리고 집합적으로 아세안 차원에서 미중 전략 경쟁의 격랑 속에 나아갈 방향을 잡는 것이 쉽지 않다. 동남아 국가들이 모인 지역 기구 차원에서도 아세안은 위기를 맞고 있다. 아세안중심성의 위기로 대표되는 아세안의 위기는 인태 지역 국제 관계에서 아세안이 가진 중요성이 대내외 도전으로 인해 낮아지는 것이 핵심이다.1)
 

아세안이 위기를 맡고 있는 시점에서 말레이시아에 의장국 순번이 돌아온 것은 여러 가지 차원에서 향후 아세안의 진로를 흥미롭게 한다. 2025년 말레이시아의 의장국 수임은 말레이시아를 포함해 아세안 내에서 목소리가 비교적 큰 국가들이 의장국을 연이어 수임하는 출발점에 있다. 말레이시아 뒤로 필리핀, 싱가포르, 태국, 베트남의 의장국 순번이 돌아온다. 말레이시아는 아세안 내에서 전통적으로 회원국들을 한자리로 끌어모으는 역할을 해왔다. 아세안의 내적 단결에도 미치는 영향이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말레이시아는 동남아 국가 중에서 강대국 사이 헤징(hedging) 전략에 가장 능한 국가다. 이런 말레이시아가 2025년 한해 아세안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지 주목되는 이유다.


이 글에서는 아세안 의장국이 아세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왜 아세안 의장국이 중요한지에 관한 일반적인 사항을 먼저 살펴본다. 그리고 의장국 말레이시아가 당면한 아세안의 과제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2025년 말레이시아가 자신의 대외정책 특징인 헤징 전략을 어떻게 아세안 내에서 펼 가능성이 있는지, 그리고 이런 말레이시아의 아세안 운영 전략이 어떤 유산을 아세안에 남길지에 대해서 분석한다.


아세안 의장국의 의미와 역할


동남아 지역의 10개국으로 구성된 아세안은 회원국이 1년씩 알파벳 순서로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의장국을 맡는다. 이에 따라 2024년 라오스에 이어 2025년은 말레이시아가 의장국을 맡게 된다. 이후로 2026년은 필리핀이, 2027년은 싱가포르가, 2028년은 태국이, 그리고 2029년은 베트남이 의장국을 맡는다. 2021년에 쿠데타가 발생한 미얀마는 원래 말레이시아 다음으로 2026년 의장국을 맡을 순번이었으나 아세안 내에서 회원국 간 합의에 의해 2026년 미얀마의 의장국 자격을 사실상 박탈하고 대신 그 다음 차례였던 필리핀이 2026년 의장국을 맡게 되었다. 대체로 더 오래된 회원국, 국력이 큰 국가가 더 큰 영향력을 갖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싱가포르, 필리핀, 그리고 최근 몇 년 사이 베트남이 좀 더 의장국으로 활동적이고 목소리가 큰 편이다. 반면 브루나이,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는 그 반대라고 볼 수 있다.


1년씩 돌아가며 맡는 의장국이므로 큰 의미가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아세안이라는 10개국의 지역 협력체를 운영해야 하는 의장국의 부담은 크다. 연간 1,000여건 이상 아세안 내 각급 정부간 회의가 펼쳐지는데 이 회의의 의장을 모두 의장국이 담당해야 한다. 상반기 아세안 정상회의, 그리고 하반기에 있는 아세안 정상회의, 아세안+3 정상회의, 그리고 동아시아정상회의(East Asia Summit, EAS)를 의장국으로 치러내야 한다. 아세안 주도의 아세안안보포럼(ASEAN Regional Forum, ARF)의 의장도 아세안 의장국이 맡는다. 의장국 역할 뿐만 아니라 총 18개국이 모이는 EAS의 경우 각국 정상과 대표단, 취재진을 수용할 호텔과 같은 의장국의 회의 관련 인프라도 문제가 된다.


아세안 의장국은 그 해 아세안의 캐치프레이즈를 설정한다. 이 캐치프레이즈는 의장국이 한 해 아세안을 운영하면서 역점을 둔 사업을 묘사한다. 의장국의 임무로 가장 중요한 사항은 정상회의를 포함한 여러 회의의 의장성명 초안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회원국 사이 협의와 합의를 중시하는 아세안의 원칙상 의장국이 초안을 만들더라도 의장국 마음대로 성명을 발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아세안 회원국의 합의를 도출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안에서 어떤 점을 강조하고 어떤 점을 제외할지에 대해서 일차적으로는 의장국 의사가 반영된다. 간단히 말해 의장국이 어느 정도 아세안 내 어젠다 세팅과 아세안 내 합의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의미다. 혹은 반대로 의장국이 아세안 내 합의를 무시하고 자기 이익을 고집해 아세안 전체에 부정적인 의미에서 영향을 줄 수도 있다. Phnom Penh fiasco라고 알려진 2021년 아세안 외교장관회의가 이런 경우다.2)


[표 1. 2020~2025 AEAN 의장국 및 캐치프레이즈]
 


한편 아세안의 주요 국가, 즉 아세안이 처음 만들어 질 때부터 아세안의 회원국이었던 ASEAN 5(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태국, 싱가포르)는 초창기부터 의장국 수임을 계기로 아세안의 중요한 제도적 변화를 추진하거나 이정표를 남기려는 노력을 해왔다. 특히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는 의장국으로 이런 제도적 흔적을 자주 남겼다. 말레이시아는 1997년 의장국 당시 아세안의 장기 비전인 ASEAN 2020 비전을 주도했고, 2005년에는 EAS의 창설을, 2015년에는 아세안공동체 선언을 의장국으로 맡았다. 2025년 말레이시아 의장국 하에서 향후 20년의 아세안 비전인 아세안공동체비전 2045(ASEAN Community Vision 2045)가 발표될 전망이다. 인도네시아 역시 의장국 계기로 1976년 아세안우호협력조약(ASEAN Amity and Cooperation Treaty, TAC)으로 알려진 발리협약I(Bali Concord I), 2003년 아세안공동체의 기틀이 된 발리협약II, 그리고 2011년 주요 글로벌 이슈에 대한 아세안 단일 입장을 담은 발리협약III을 의장국 자격으로 도출해냈다.


의장국 말레이시아가 당면한 과제


아세안이 내외적으로 당면한 과제는 곧 아세안 의장국인 말레이시아의 당면 과제가 된다. 코로나-19 이후 경제성장 추세의 회복, 새로운 성장 동력의 확보, 미-중 경제전쟁에서 아세안 국가의 생존 등 경제적인 과제도 있겠지만 전략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면 현재 아세안이 마주하는 내외적 과제는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된다. 미중 전략 경쟁에 따른 압력이 외적 과제라면 남중국해 문제는 외적 위협과 내적 분열이 복합된 도전이다. 이 외적 도전 과제는 아세안중심성의 재강화라는 명제와 연결된다. 내적으로는 분열된 아세안을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 특히 미얀마 문제와 남중국해 문제를 둘러싸고 나타나는 이견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가 아세안중심성 강화 과제의 핵심이다. 아세안 단결이라는 내적 결속이 곧 아세안중심성의 강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미중 경쟁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며 이미 아세안 국가들은 개별적으로, 그리고 집합적으로 미중 경쟁의 맥락에서 자신의 이익을 강화하기 위한 각자의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미중 경쟁이 단순한 전략 경쟁을 넘어서 기술, 경제, 공급망 등 전방위로 확대되면서 아세안 국가들이 마주하는 압력 역시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자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위치를 정하는데 갈수록 복잡한 함수가 동원된다.


무엇보다 의장국으로 말레이시아가 마주해야 할 2025년 강대국 경쟁이란 변수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미국에서 트럼프 행정부 2기가 등장하는 현실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정책, 특히 트럼프 행정부의 대 동남아 정책에 따른 지역의 세력균형의 변화, 동남아에 가해지는 전략적 압력, 그리고 개별 국가 및 아세안의 이익 확보가 말레이시아의 과제다. 트럼프 행정부 1기는 동남아, 아세안 지역에 대해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중국과 양자 갈등과 경쟁만이 트럼프 행정부의 대외정책 어젠다에 있었을 뿐 중국을 간접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동남아 지역에 대한 최소한의 관여 정책도 없었다. 특히 아세안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세안 주도의 지역 다자협력에 대한 트럼프 행정부의 무관심을 넘어서 무시는 아세안 국가와 미국 사이 관계를 크게 저해했다.


지금으로서는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도 이런 1기 대 동남아 정책 방향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3) 문제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 동남아 경시 혹은 무시 정책이 장기적으로 미국의 이 지역에 대한 관여 정책의 근간을 흔들게 되고 그에 따라 미국의 역할에 대해 가졌던 동남아 국가들의 확신도 약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 전개는 아세안 지역에서 아세안 국가들에게 전략적 공간과 자율성을 확보해주던 미국과 중국 사이 힘의 균형, 영향력의 균형의 붕괴를 가져올 수 있다. 이로 인해 동남아 국가들은 특정 강대국 영향권으로 급속히 빨려들어가면서 자율성과 대 강대국 레버리지를 상실할 위험에 처한다.


강대국 경쟁의 맥락과 아세안 내부의 단결 저해의 문제가 함께 나타나는 이슈가 남중국해 문제다. 의장국으로 말레이시아는 중국의 남중국해에서 행동을 통제하며, 미국의 관여를 확보하는 동시에 아세안 내 남중국해 문제 관련 합의를 만들어 내는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특히 수년간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남중국해에서 행동규약(code of conduct) 협상에서 진전을 가져오는 것에 말레이시아는 관심을 보이고 있다.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공격적인 행동은 이미 오래된 일이다. 2024년 중국의 공격적인 행동은 특히 필리핀과 갈등을 많이 빚었다.4) 미국, 일본, 호주 등은 필리핀을 지원하면서 양자, 다자 안보협력을 강화했다. 기존 미국 주도 쿼드(Quad)에 필리핀이 가세하면서 만들어진 S-Quad는 필리핀 입장에서 바람직한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아세안 회원국 입장에서 강대국의 군사적 관여가 일정한 선을 넘을 경우 아세안 국가들에게 가져올 수 있는 전략적 부담이 있으므로 반드시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다. 남중국해 문제에 관한 아세안 회원국 입장이 서로 차이를 보이는 기존 아세안 내 복잡한 상황 위에 최근 S-quad로 대표되는 강대국의 관여 강화는 아세안 내 새로운 분열의 출발점이 되거나 기존 분열의 악화를 가져올 수 있다.


아세안 내 중요 전략적 사안을 놓고 입장의 차이가 점점 명확해지는 상황은 아세안 내적 결속(ASEAN unity)에 분명히 부정적이다. 이런 내적 분열은 아세안의 집단적 행동 가능성을 낮추고 나아가 대외적으로 아세안 중심성이라는 담론을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다.5) 아세안 10개국이 강대국에 대해, 지역 문제의 주요 사안에서 하나의 목소리를 낼 때 아세안의 레버리지는 강화되고 이런 강력한 레버리지는 아세안이 지역 전략 문제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놓여야 한다는 아세안중심성 담론을 강화하는데 중요하다. 지난 10여년간 지속적으로 약화된 아세안중심성 담론은 강대국 경쟁, 남중국해 문제 등 내외 변수가 가져온 아세안의 내적 분열로 인해 더욱 악화되고 있다. 2025년 아세안 의장국인 말레이시아가 이 복잡한 문제를 다 해결할 수는 없지만 아세안중심성 약화의 추세를 멈추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정도의 역할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의장국으로 말레이시아 앞에 놓인 문제는 외적 문제뿐만 아니라 내적 분열의 요소인 미얀마 문제도 있다. 미얀마는 2021년 군부에 의한 쿠데타 이후 계속 아세안 전체의 골칫거리로 남아있다. 2021년 쿠데타 직후 아세안 정상들이 모여 미얀마 문제 해결을 위한 5개항의 합의(5 points of consensus)를 만들어 내고 아세안 관련 회의에 미얀마 고위 군부 인사의 참석을 금지한 조치 외에 지난 4년간 미얀마 상황 개선을 위한 효과적 조치를 내놓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아세안 내에서는 미얀마 군부에 대해 보다 비판적인 입장과 수용적인 입장이 나뉘기 시작했고 이는 새로운 아세안내 분열의 씨앗으로 커지고 있다.


특히 미얀마 군부는 2025년 11월 총선을 실시하고 권력을 민간에 이양하겠다는 주장을 하고있다. 군부에 의해 통제된 선거가 될 가능성이 높고 미얀마 민주화, 자유화를 지지하는 세력들은 선거를 보이콧할 자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세안 내에서는 이 선거를 계기로 미얀마의 회원 자격을 정상화하자는 주장이 고개를 들 가능성이 높다. 크게 실질적인 제재 수단도 없으면서 미얀마에 대해서 거리를 두고 있는 현 상황은 미얀마와 다른 아세안 국가의 관계, 아세안 내부의 단결을 위해서 좋지 않다는 주장이다. 물론, 2025년 11월 선거가 치러질 때는 말레이시아의 의장국 지위는 이미 필리핀으로 넘어간 상황이다.6) 하지만 2025년 한해 미얀마 문제, 특히 선거 이후 미얀마와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레이시아는 회원국 사이 중지를 모아야 한다.


말레이시아의 전략: 헤징과 내적 합의 만들기


2025년 말레이시아가 아세안의 의장국을 맡으며 가장 주목받는 부분은 헤징의 달인인 말레이시아가 아세안을 어떤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현재 아세안이 당면한 과제를 간단히 요약하면 미-중 경쟁 등 강대국 전략 경쟁으로부터 유래한 아세안 중심성의 약화, 아세안 내부 이견으로 인한 아세안 내적 단결의 약화, 이런 단결 약화가 더욱 악화시킨 아세안 중심성의 문제로 요약된다. 대외적으로 강대국 전략 경쟁의 파고를 넘는 일과 내적으로 아세안 내 단합을 다시 도모하는 것으로 말레이시아의 과제는 압축된다. 이런 과제에 직면해 말레이시아는 대외적으로는 헤징 전략을, 대내적으로는 아세안 내 명사를 모은 자문단의 집단적 지혜에 의존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말레이시아는 약소국의 대 강대국 전략을 묘사하는 헤징이라는 말이 만들어지기 훨씬 전부터 경쟁하는 두 강력한 세력, 블록 사이에서 헤징 전략을 효과적으로 구사해왔다. 이런 전략을 통해 국가의 힘이나 크기에 비해 강한 외교력을 가진 국가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독립하기 이전인 1948년부터 독립 직후인 1960년까지 말레이 반도에서 공산주의를 막기 위한 비상통치(Malayan Emergency)를 했을 정도로 냉전 블록에서 말레이시아는 명확히 반공 진영에 속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레이시아는 1970년 비동맹운동에 가입했고 1974년 아직 개혁개방 이전의 중국과 국교를 맺었다. 말레이시아는 초기부터 특정 진영에 포함되어 그 노선을 고수하기 보다는 국가 이익을 위해 서로 경쟁하는 진영을 넘나드는 외교를 펼쳤다.


1981년 집권한 마하티르(Mahathir Mohamad) 총리는 미국 주도의 냉전 블럭 안에서 빠른 경제 성장을 구가하면서도 말레이시아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서방 국가의 대외정책에 대해서는 늘 비판적이었다. 마하티르는 서방문화의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서 꾸준히 비판을 하면서 아시아 국가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아시아만의 가치(Asian Values)가 있다고 주장하고 서구식 민주주의를 비판했다. 이런 마하티르의 서구에 대한 비판은 세계화, 1997 아시아 경제위기, 서구의 신식민주의, 서구의 위선에 대한 비판이란 형태로 서방 국가를 겨냥했다. 경제적 친서방, 정치적 반서방의 담론으로 마하티르식 헤징 전략을 취해왔다.


마하티르의 오랜 정적이자 현 총리인 안와르 이브라힘(Anwar Ibrahim) 총리 역시 국내 정치적으로는 마하티르와 대립했을지 모르지만, 대외정책에서는 유사한 태도를 보인다.7) 안와르 총리도 서구적 가치와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아시아적 가치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특히 미국과 중국 사이 전략 경쟁, 더 나아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수정주의 세력 연대라고 칭해지는 중국-러시아와 그 반대의 미국간 전략경쟁에서 미국에 대한 견제를 위해 중국-러시아와 관계 강화에 적극 나섰다. 하마스-이스라엘 분쟁 이후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미국에 대한 비판은 더욱 강해졌다. 인구 절반 이상이 무슬림인 말레이시아는 정부를 막론하고 무슬림 연대 차원에서 늘 팔레스타인 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고, 팔레스타인을 지지해왔다. 이런 친팔레스타인, 반이스라엘 정책 노선은 현재 안와르 정부에서도 현재 진행형이다.


안와르 총리는 취임 이후 2023년 두 차례, 그리고 2024년 한 차례 중국을 방문했다. 미국은 두 차례 방문했는데 모두 UN 총회, APEC 참석 등 다른 다자회의 계기였다. 안와르 총리 취임 이후 중국과 경제협력도 강화되었다. 더 나아가 특히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말레이시아와 러시아 사이 협력도 활발해졌다. 2024년에 말레이시아는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 등과 함께 중국, 러시아가 주도하는 BRICS 회원 가입 신청도 했다.8) 이런 일련의 안와르 정부의 대외정책이 보여주는 것은 말레이시아의 대외정책은 여전히 매우 유연한 강대국 사이 헤징이라는 전통에 충실하다는 점이다. 안와르 행정부가 중국, 러시아와 외교적 거리를 좁히는 것은 미국진영으로부터 이탈이라기보다는 양 진영에 동시에 관여하는 전략이다. 말레이시아 입장에서 미국은 여전히 두 번째로 큰 무역 상대인 동시에 세 번째로 큰 해외직접투자를 말레이시아로 들여오는 국가다.9)


미국과 중국 혹은 미국과 미국에 반대하는 중국-러시아 연합 사이 효과적인 헤징 전략이란 줄타기는 말레이시아가 아세안 의장국으로 역할을 할 때도 그대로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말레이시아가 의장을 맡은 아세안은 어느 특정 강대국 쪽으로 쏠리는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미국이든, 중국이든, 러시아든 어떤 세력의 행동이라도 아세안의 이익을 침해하거나 자율성을 침해한다고 판단될 때 아세안 의장국으로 말레이시아는 목소리를 높일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말레이시아의 입장이 그대로 아세안의 행동으로 투영되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다른 회원국들의 합의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세안 정상회의, 아세안+3, EAS, ARF, 아세안(확대)외교장관회의 등의 의장성명 초안은 이전에 비해 훨씬 명확한 입장을 드러내고 최종안 역시 이런 의장국의 명확한 입장에 영향을 받을 것이다.


두 번째로, 안와르 총리는 역내 주요 국가의 대외정책에 영향력 있는 인물을 모아 아세안 의장국의 자문단을 구상하고 있다. 12월 16일 안와르 총리는 전 태국 총리 탁신(Thaksin Shinawatra), 전 싱가포르 외교장관 조지 여(George Yeo), 전 인도네시아 외교장관 레트노 마르수디(Retno Marsudi) 등으로 구성된 아세안 의장 자문단을 구성한다는 발표를 했다.10) 아세안 내 주요 국가의 영향력 있는 전 관료, 정치인들로 구성되었다. 레트노는 인도네시아 조코위(Jokowi) 정부에서 외교장관으로 쿠데타 이후 미얀마와 아세안 관계, 그리고 미얀마 내 소수종족인 로힝야(Rohingya) 문제를 오랫동안 다루어 왔다. 조지 여는 아세안 지역에서 명성이 높은 외교관이자 전략가로 아세안의 대 강대국 전략 등의 문제에 정통하다. 한편 탁신은 현 태국 총리인 패통탄(Paetongtan Shinawatra)의 아버지로 과거 총리 시절 아시아협력대화(Asian Cooperation Dialogue)를 시작한 바 있고, 현 총리의 아버지로 태국 대외정책에도 일정한 영향력 행사가 가능하다.


안와르 총리가 이런 일종의 명망가 집단(eminent persons’ group)을 구성한 것은 아세안 의장국으로 말레이시아와 안와르 총리의 결정 혹은 전략 방향이 말레이시아 독단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지역 국가들의 명망가와 협의한 결과라는 점을 앞세우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긍정적으로 보면 아세안 내 중지를 모으려는 것이고 주요 논쟁적 이슈에 대해 이 문제를 다루었던 인사들의 조언을 얻으려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보면 이들 전문가 혹은 명망가의 뒤로 말레이시아의 결정을 숨기겠다는 의도로도 읽힐 수 있다. 어쨌든 말레이시아가 의장국으로 골치 아픈 내적 분열의 문제를 헤쳐가기 위해 이런 명망가 집단과 같은 노력이 어떤 결실을 가져올지는 좀 더 두고 지켜볼 문제다.


말레이시아의 아세안 의장국 수임을 앞두고 많은 아세안 전문가들이 말레이시아가 해결해야 할 과제들과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론에 대한 의견을 쏟아내고 있다. 과제가 큰 만큼 1년이라는 의장국 임기가 너무 짧아 그 안에 중차대한 과제를 해결하기 쉽지 않다는 관측도 있다.11) 이는 말레이시아의 한계를 지적하는 관측이라기 보다는 말레이시아가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한 과도한 기대를 경계하는 목소리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말레이시아의 의장국 수임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한 역내, 역외 전략적 불안정성과 겹친다. 1년이라는 의장국 임기, 그리고 협의와 합의, 주권 존중 및 내정 불간섭이라는 아세안의 내적 질서는 의장국이 할 수 있는 역할을 크게 제한하는 것이 사실이다. 말레이시아는 2025년 의장국으로 앞서 언급한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되, 일단 방향을 설정해 놓고 아세안 내 변화의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만으로도 큰 역할을 했다고 향후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2025년 이후 잇달아 의장국을 맡는 필리핀, 태국, 싱가포르, 베트남 등 말레이시아처럼 아세안 내 목소리와 영향력이 큰 회원국들이 과제의 해결을 하나씩 마무리 해가는 기초를 놓는 일도 말레이시아에게는 중요할 것이다.
 


1) 과거 아세안 밖의 전문가들에 의해 주로 아세안중심성의 위기가 지적되었는데 최근 들어 아세안 전문가 사이에서도 아세안중심성의 위기에 대한 진단이 부쩍 늘고 있다. 대표적으로 Dewi Fortuna Anwar. 2023. “ASEAN Centrality: Opportunities and Challenges” in The Indo-Pacific Theatre: Strategic Visions and Frameworks. Sabani Roy Choudhyry ed. Routledge: London.; Rizal Sukma. 2024. “If ASEAN is to remain central to the region it must deal with its institutional weaknesses” East Asia Forum. 29 September.
2) 2012년 캄보디아가 의장국을 할 당시 아세안외교장관회의(ASEAN Ministers’ Meeting)는 남중국해 문제를 의장성명에 언급하려는 몇몇 아세안 국가와 이를 막으려는 의장국 캄보디아 사이 합의에 실패했고 그 당시까지 진행된 45차례의 아세안외교장관회의 중 처음으로 의장성명을 발표하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Sabam Siagian. 2012. “Is Phnom Penh fiasco the beginning of end of ASEAN?” GMA News Online. July 17.
3) Hoang Thi Ha and William Choong. “Trump 2.0 Presidency: What Is in Store for Southeast Asia?” Fulcrum. November 20, 2024.
4) Al-Jazeera. “What’s behind Escalating China-Philippines Tensions in the South China Sea?” Al-Jazeera. October 11 , 2024.
5) Joanne Lin and Sharon Seah, “ASEAN’s Unity Under the Microscope” Fulcrum. July 30, 2024.
6) 아세안 의장국은 대개 10월 경 개최되는 하반기 아세안 정상회의를 계기로 차기 의장국에 권한을 넘겨준다.
7) Cheng-Chwee Kuik. 2024. “Explaining Hedging: The Case of Malaysian Equidistance” Contemporary Southeast Asia: A Journal of International and Strategic Affairs. 46: 1.
8) Lam Choong Wah. “Malaysia Bandwagoning with BRICS” East Asia Forum., December 12, 2024.
9) Emir Zainul. “Malaysia’s trade contracts but exceeds RM2 tril for third consecutive year in 2023 — Miti” The Edge. January 19, 2024.
10) Izzah Aqilah Norman. 2024. “Anwar forming advisory team for Malaysia's ASEAN chairmanship; names include Thaksin and reportedly George Yeo” Channel New Asia., December 16, 2024.
11) Elina Noor, “How Malaysia can boost ASEAN agency and centrality amid global challenges” Asia Research Institute, National University of Singapore. December 2, 2024; Shannon Teoh. “Great expectations as Malaysia is set to head ASEAN in 2025” The Straits Times. 31 October.; Angeline Tan and Yanitha Meena Louis. 2024. “Malaysia’s ASEAN chairmanship is a catalyst, not a panacea” The Interpreter. October 16, 2024.


이 글에 포함된 의견은 저자 개인의 견해로 제주평화연구원의 공식입장과는 무관합니다.

기획자: 강영훈 제주평화연구원 원장, 편집 : 제주평화연구원 이혜진 연구원


이재현 (아산정책연구원 수석연구위원 )
 

이재현 박사는 아산정책연구원의 수석연구위원이다. 한국동남아학회 부회장이며, 대통령직속 신남방정책특별위원회 자문위원을 역임했다.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학 학사, 동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받고, 호주 Murdoch University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학위 이후, 한국동남아연구소 선임연구원을 거쳐 2012년까지 국립외교원의 외교안보연구소에서 객원교수를 지냈다. 주요 연구분야는 동남아 정치, 아세안, 동아시아 지역협력 등이다. 최근 주요 연구결과물은 다음과 같다. 한국과 아세안의 전략적 공통분모와 신남방정책(2019), 비정형성과 비공식성의 아세안 의사결정(2019), G-Zero 시대 글로벌, 지역 질서와 중견국(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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