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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의 미사일 실험과 한·미의 새로운 접근법
    저자
    이성우 (제주평화연구원 분쟁해결연구부장)
    발간호
    2017-39
      미국을 목표로 하는 북한의 군사적 도발이 심각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북한은 7월 4일 특별 중대 보도라며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발표한 국방과학원 보도에서 “국방과학원 과학자, 기술자들은 새로 연구개발한 대륙간 탄도로켓 화성 14형 시험발사를 성공적으로 진행했다.”라고 밝혔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여 온 대응을 유연대응에서 강경대응까지 검토해보고 그 대안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첫째, 가장 눈에 띠는 반응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의 평가절하인데 이는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 소극적 대응이다. 미국과 우리 당국은 북한이 4일 발사한 미사일이 ICBM급 사거리를 가진 대륙간탄도미사일이지만 핵심 기술인 대기권 재진입 기술은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둘째, 북한에 대한 조롱과 비아냥거림의 ‘tit-for-tat’인데 사태해결에 도움이 안 되는 감정적 대응이다. 미사일 발사 직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트위터에 “북한이 방금 또 다른 미사일을 발사했다. 이 사람은 할 일이 그렇게 없나”라고 조롱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고 김정은은 “미국이 독립기념일에 받은 선물보따리를 불쾌해 했을 것"이라며 "앞으로도 심심치 않게 선물을 자주 보내자."라고 비아냥댔다. 셋째, 국제사회의 공조를 통한 북핵 문제의 해결이라는 진부하지만 특별한 문제 해결 능력도 없는 대응 방안은 그 실효성에 있어 여전히 의문이 많다. 미국은 유엔 안보리 긴급회의에서 대북 군사 공격을 언급하며 북한에 대한 압박에 나섰지만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과는 확연한 입장차를 드러냈다. 중국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을 동결하고, 미국과 한국은 대규모 합동군사훈련을 중단하라는 기존의 제안을 되풀이했다. 러시아는 북한의 이번 발사가 ICBM이 아닌 중거리 미사일이라고 거듭 주장하면서 제재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군사적 행동에도 반대한다는 원칙론을 강조했다. 중국과 러시아는 미국의 대북제재안에 반대하기 때문에 미국의 의도대로 국제기구 차원의 대북제재가 불가능하다. 넷째, 미국은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 능력의 진전을 막고 북한정권의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대해 실질적인 압력을 행사하기 위해 원유의 공급을 차단하고 북한노동자를 통한 외화유입을 차단하기 위해 제3국에서 북한 노동자의 고용을 금지하는 이른바 세컨더리 보이콧을 실질적으로 추진하고자 한다. 유엔안보리 결의를 통해 지속적으로 대북제재를 추진했지만 실효성이 없었고 북한은 자체기술로 핵과 미사일 기술을 진전시켰다. 이런 점에서 미국은 독자적인 제재를 통해서도 실효성 있는 대북한 제재와 압박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다섯째, 최고정책결정자를 물리적으로 제거하는 참수작전이나 핵시설에 대한 외과 수술식 타격을 포함한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조치의 사용은 위협적으로 보이지만 주변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에게는 불가피한 피해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가용한 대안은 아니다. 미국의 틸러슨 국무장관은 북한에 대한 선제적 군사 공격을 언급하면서, 미국의 입장에서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중단시키기 위한 단일의 공격은 선제공격이 아닌 방어적인 조치라고 주장하지만 한 번의 공격으로 북한의 미사일 발사시설을 무력화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무엇보다도 전시에는 북한이 이동식 발사 장치를 사용하므로 사전 공격을 통해 효과적으로 북한의 미사일 발사 장치를 제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오히려 북한이 미사일을 동시다발적으로 발사하는 사태가 발생하면 미사일 방어시스템은 현실적으로 소용없는 상황이 된다. 위에서 나온 다섯 가지 선택은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군사적 공격까지 이른바 Graham Allison의 《Essence of Decision》에서 나온 대안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다. 북한 핵문제는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에 가장 선결되어야할 과제라는 점에서 여론의 관심이 높은 것은 적절하다. 다만 한반도의 비핵화라는 정책목표를 달성하는 정책수단을 동원하는 데 있어서 압박과 제재를 전면 배제하고 대화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주장이나 대화와 협상을 전면 배제하고 압박과 제제만이 유용한 수단이라는 주장은 이념적으로 적절하지 못하다.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통해서 확인된 내용은 약간의 입장 차이는 있지만 강경정책과 유연정책을 동시에 적용한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강력한 힘에 기초한 외교”와 문재인 대통령의 “북한과의 대화를 추구하지만 이 역시 압도적인 국방력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주장은 같은 맥락이다. 한국과 미국은 확고한 공조 아래 북한에 대한 원유공급차단과 같은 경제적 제재는 물론 군사적 선제타격과 같은 군사적 조치의 사용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에서 북한과 대화와 협상을 통해 비핵화를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20년간 한국의 진보정권과 보수정권이 번갈아가며 사용한 대화 또는 제재의 단일 처방을 통해 비핵화를 달성하지 못했다면 이제 복합 처방이 필요하다. 現 제주평화연구원 분쟁해결연구부장. 단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2004년 미국 University of North Texas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음. 단국대학교 분쟁해결연구센터에서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며 “한국의 공공분쟁 사례연구”를 주제로 대한민국 학술진흥재단 중점연구소 연구과제를 수행하였음. 학술활동으로는 미국국제정치학회가 주관하는 International Studies Quarterly의 Referee로 활동한 바 있음. 저서로는 『2011 한국인의 평화관: 통일정책과 여론 』 및 『2010 한국인의 평화관: 외교정책과 여론』 등이 있음.
  • 류사오보의 죽음으로 본 G2 중국의 미래
    저자
    이성우 (제주평화연구원 분쟁해결연구부장)
    발간호
    2017-35
      외신이 중국의 인권 운동가 류사오보의 사망소식을 전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한 류사오보는 2008년 12월 중국에서 공산당 일당체제의 종식을 요구한 ‘08헌장’ 서명 운동을 주도하다가 2009년 12월 ‘국가전복’ 혐의로 징역 11년을 선고받고 랴오닝성 진저우 교도소에 수감 되었다. 수감 중이던 2017년 5월 말 정기 건강검진에서 간암 판정을 받고 수일 후 가석방되어 교도소 밖 중국의대 제1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그는 결국 7월 13일 오후 9시에 사망했다. 류사오보의 사망은 중국지도부의 의지와 무관하게 G2국가 중국의 장래에 가지는 상징적 의미가 심대할 것이다. 중국은 미국과 함께 세계를 지도하고 주도하는 G2의 야심, 이른바 문화강대국으로서의 중국몽(中国梦: China Dream)을 키우고 있다. 중국몽에 대해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2013년 12기 전국인민대표대회 폐막연설에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실현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중국몽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를 제시했는데 물질적 기반이 주를 이룬다. 첫째, 민족적, 지역적, 그리고 경제적 차등을 극복하는 국가통합, 둘째, 민생의 경제적 안정에 기초한 인민의 행복, 셋째, 개혁개방의 완성을 의미하는 사회주의 국가의 현대화, 넷째, 경제력에 기초한 군의 현대화를 통한 군사강국, 다섯째, 고속성장을 통해 G2 미국을 뛰어넘는 초강대국화이다. 중국이 지금까지 달성한 경제성장을 바탕으로 한 산업, 군사, 과학, 기술, 그리고 사회간접자본에 이르기까지 괄목할 발전을 이룩했다. 경제, 산업, 기술에서 발전을 바탕으로 동아시아 영향력 확대를 위해 AIIB, 일대일로,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에서 중국의 영향력 확대와 같은 대외관계에서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중국이 초강대국이 되기 위한 물적기반의 일부는 이미 갖췄거나 차근차근 목표를 향해가고 있다고 판단되는 대목이며 이는 중국의 정책결정자들에게 자신감의 근거가 되는 부분이다. 한편에서 중국의 지도부는 미국이 구가하는 소프트파워의 중요성을 감지하고 미국이 보유하고 있는 기축통화국의 지위와 국제규범의 형성자로서 가지는 힘을 확보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미국에 대한 학습효과에 따라 중국도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만들고 중국에 불리한 국제규범을 허용하지 않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공자학당, 공적개발원조, 그리고 국제평화유지활동과 같은 국제사회의 공헌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중국 고유의 것이 아니라 미국을 따라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중국몽을 실현시켜줄 중국의 고유한 가치체계는 아직 없다. .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세계 패권의 축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대서양을 건너간 근저에는 미국의 경제력 뿐 아니라 영국이 의지하던 낡은 국제규범을 능가하는 그래서 국제사회의 지지와 동의를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국제규범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당시의 미국은 식민지에 반대하는 민족자결주의원칙을 주장하고 국제기구를 통한 1국 1표의 국제의회주의 규범을 주장했다. 미국이 패권국의 지위를 승계한 이후에도 미국은 국제정치에서도 인권외교와 같이 국제사회에서 규범을 선도하는 지도력을 발휘하고자 노력했다. 물론 9ㆍ11 테러 이후 미국 행정부의 무슬림 전쟁포로에 대한 비인도적 처우는 민주주의의 규범에 반하지만 적어도 미국 언론은 이를 비판했고 그래서 바깥 세상에 알려지고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미국을 옹호하자는 것이 아니라 초강대국의 조건으로 경제적 기술적 국가역량이 필요조건이라면 규범적 도덕적 설득력이 충분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이 미국을 능가하는 초강대국이 되고 싶다면 중국은 현재 미국이 가지고 있는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규범을 초월하는 새로운 국제규범을 제시해야 한다. AIIB와 일대일로를 통한 주변국에 기간시설 건설참여라는 경제적 인센티브만으로 주변국의 도덕적, 규범적, 그리고 정치적 지지를 획득하고 그들을 지도하는 패권국이 될 수 없다. 초강대국 중국몽을 위해서는 미국보다 높은 민주주의의 규범을 수용해야 한다. 류사오보의 사망은 초강대국 중국몽이 왜 적어도 당분간은 불가능한지를 보여주는 시험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現 제주평화연구원 분쟁해결연구부장. 단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2004년 미국 University of North Texas에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음. 단국대학교 분쟁해결연구센터에서 연구위원으로 활동하며 “한국의 공공분쟁 사례연구”를 주제로 대한민국 학술진흥재단 중점연구소 연구과제를 수행하였음. 학술활동으로는 미국국제정치학회가 주관하는 International Studies Quarterly의 Referee로 활동한 바 있음. 저서로는 『2011 한국인의 평화관: 통일정책과 여론 』 및 『2010 한국인의 평화관: 외교정책과 여론』 등이 있음.
  • 한국의 아세안 가입을 제안하며
    저자
    신윤환 (한국동남아학회)
    발간호
    2017-37
      과연 한국과 아세안은 미래의 생존과 번영을 공유할 수 있는 수준의 특별한 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요? 한국과 아세안은 최근 30년 동안 몇 단계를 거치며 그 관계를 급속히 발전, 심화시켜 왔습니다. 1989년 11월 부문별 대화관계 수립은 한-아세안 관계 제도화의 시발점이 됩니다. 한국의 정치가 민주화됨에 따라 해외투자가 활발해지고, 그 시기 해외투자는 대체로 노동집약적인 산업에 집중되어 동남아를 향하였습니다. 1997년은 한-아세안 관계에 큰 획을 그은 한 해였습니다. 아세안과 한, 중, 일이 동아시아로 확대된 지역 협력과 통합을 추구하는 아세안+3 정상회의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세안+3과 더불어 한국과 아세안 간에 정상들이 직접 소통하는 아세안+1(한국) 프로세스도 시동되어, 양자관계를 가속하였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20년은 한-아세안 관계를 제가 2009년 제1차 특별정상회의(Korea-ASEAN Commemorative Summit)에 붙인 슬로건처럼 “실질적 동반자, 영원한 친구 관계(Partnership for Real, Friendship for Good)”로 만드는 데 손색이 없을 정도로 실질적,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왔습니다. 한국과 아세안은 현재 "전략적 동반자관계(strategic partnership)"로 불리는 공식적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한-아세안관계의 가치와 중요성은 경제인, 전문가, 정부 모두가 공히 인식하고 있는 바이지만, 한국 외교와 대외정책은 기존의 프레임과 사고 속에 갇혀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이 아세안과는 경제 분야의 협력을 넘어서는 함께 할 일이 없고, 다른 "문명권(civilization)"에 속하는 동남아와는 하나의 "공동체(regional community)"를 건설할 수 없으며, 미국과 유일하게 맺고 있는 군사안보적 성격의 동맹관계(alliance)야말로 한국 생존을 위한 "종결자"라는 믿음이 한국인들을 낡은 안보와 대외정책 프레임이 가둬 놓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정부는 남북회담, 4강 외교, 6자회담, 미국의 개입, 중국의 대북한 압력까지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이 없지만, 남북관계는 호전은 고사하고 핵전쟁의 위험이 가중되면서 오히려 파국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체제 구축은 우리 민족이 꼭 풀어야 할 숙제이지만, “동북아”(Northeast Asia)라는 작은 연습장 종이 위에다 같은 문제를 수십 년 동안 풀다 보니 정답은 구하지 못하고 종이 여백만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제는 대안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아세안에서 그 대안을 찾을 수는 없을까요? 이 시점에서 한-아세안 경제협력 심화를 구조적으로 설명한 "상보성(complementarity)" 개념을 비경제적인 상황에 활용해 보고 싶습니다. 한국과 아세안 간에는 경제협력 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와 정치안보 분야의 협력에도 높은 상호보완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국과 아세안은 강대국으로부터 식민통치를 함께 경험하고, 동서냉전의 실질적 최대피해자로서 동병상련하는 관계이며, 동아시아의 지정학에서 중국과 일본에 대한 불신의 감정과 위협을 느끼는 정서적 유대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미국의 압력으로 참여했던 제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을 이유 있는 예외로 한다면, 한국과 동남아는 무력 충돌을 벌인 적도 없고, 서로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품을 거리도 없습니다. 동중국해, 대만, 남중국해가 가로막고 있어 영토분쟁도, 직접적인 무력충돌의 가능성도 없습니다. 한국과 동남아가 외교관계를 수립한 이래 한 번도 심각한 갈등을 겪거나 긴장 관계에 놓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군사안보적 협력의 전망을 밝혀 줍니다. 한국과 아세안은 서로 군신관계, 후원수혜체계, 형제관계와 같은 불평등한 관계가 아니라 평등한 선린 관계에 바탕을 둔 "영원한 우정(friendship for good)"을 쌓아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정서적 유대감을 바탕으로 한국과 아세안은 정치, 군사안보, 국제관계와 같은 민감한 분야에서 좀 더 긴밀하고 좀 더 제도화된 형태의 협력이나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한 관계가 줄 이점은 너무나 많아 별도의 연구가 필요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단순히 1+1=2 또는 10+1=11이라는 산술적 합 이상의 영향력과 교섭력의 증가를 가져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양한 측면에서 상보성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단은 새로운 관계의 정립은 아세안보다 한국 쪽에 훨씬 더 큰 혜택을 가져다 줄 것으로 예상됩니다. 중국과 일본, 미국과 러시아까지 포함한 4강 사이에서 힘을 쓰지 못하고 있는 한국이 아세안과 10개국의 회원국을 조력자로 얻게 되면, 동아시아의 지역질서에서 세력균형까지는 도모하지 못할지라도 무시 못 할 한 축으로 떠오를 수는 있을 것입니다. 특히 한-아세안 협력체는 중국, 일본과 더불어 '세발달린 솥(鼎)' 모양의 안정적인 국가체제를 형성하여 동아시아의 지역적 안정에 기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평화, 자유, 중립, 비핵화를 지향하는 아세안의 창설 원칙이 한-아세안 관계에도 관철될 수 있다면, 남북분단과 북핵문제는 해결의 단초를 찾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지만 한-아세안 관계를 업그레이드하고 제도화하는 데는 실로 극복하기 쉽지 않은 장애물들도 가로막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한국과 아세안 양측 모두가 연대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국민들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하는 정지작업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동남아와 동북아라는 지리적 구분, 한국인들이 공유하는 동북아중심주의, 반세기동안 확립된 동남아적 정체성 등은 서로에 대한 동질시를 어렵게 할 것입니다. 낡은 프레임에 젖어 있는 한국의 지도자, 정책결정자, 지식인들이 한미동맹, 강대국보장론, 균형자론과 같은 전통적 안보관을 깨고 새로운 미래전략과 생존방식을 수용하는 데는 획기적인 전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설사 한국인들이 아세안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을 이루고 아세안 연대에 합의한다 할지라도, 어떻게 아세안과 동남아인들을 설득할 것인지가 매우 어려운 과제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남북분단 상황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미국과의 군사안보동맹을 맺고 있는 한국이 평화와 중립을 추구하는 아세안에게 받아들여지는 데는 힘든 선결조건이 요구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연구되어야 할 과제는 한-아세안 간에 새롭게 추진될 협력관계의 수준과 형태에 관한 것입니다. 현재의 수준, 즉 경제협력이 중심이 된 전략적 동반자관계보다 상위 수준의 협력을 목표로 한다면, ‘업그레이드된 또는 특수한 형태의 동반자관계’, 동맹과 버금가는 수준의, 예를 들면 "실행공동체(community of practice)"나 "평화연맹(peace league)"과 같은 ‘특별한 관계’, ‘아세안 가입’ 중에 한 가지가 될 것입니다. 특수한 형태의 동반자관계는 국제정치적 쟁점과 군사안보 영역까지 포함한 말 그대로 포괄적인 영역에서 동조체제를 구축하는 것이고, 더 높은 수준으로 평화, 자유, 중립, 비핵화의 원칙과 아세안헌장을 수용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 선린 평화동맹을 독창적으로 고안해 낼 수 있을 것이며, 한국이 당면하고 있는 과제들, 특히 한반도의 평화와 같은 난제들을 일거에 해결하는 데는 ‘아세안 가입’까지 고려될 수 있을 것입니다. 동남아시아에 위치한 나라들만이 아세안에 가입할 수 있다는 생각은 잘못되고 낡은 관념입니다. 동남아란 지역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가변적인 개념에 지나지 않으며, 아세안이란 인위적인 조직도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회원의 자격을 재규정할 수 있습니다. 아세안 가입을 진지하게 논의해 볼 때가 왔습니다. 現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동아연구소 소장. 한국동남아학회 회장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정치학 석사과정을 이수. 예일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으며, 1989년에는 인도네시아의 재벌형성과 국가-자본 관계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 1990년부터 지금까지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비교정치론, 동남아정치론, 정치인류학 등을 가르치고 있음. 2001년부터 서강대 동아연구소 소장으로 재임하면서 동아시아연구의 외연을 동남아시아로 확대하는 데 앞장섰으며, 2008년에는 인문한국(HK)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10명의 동남아 전공 학자들과 함께 “열린 체계로서 동남아: 지역연구의 대중적 확산과 세계적 소통”을 대주제로 10년간의 공동연구를 수행 중. 케임브리지대학 출판사가 발간하는 TRaNS: Trans-Regional and -National Studies of Southeast Asia(케임브리지대학 출판사)의 공동편집위원장.
  • The Crisis of Regionalism in Europe: What are the Implications and Lessons for Asia?
    저자
    Mark Beeson (University of Western Australia)
    발간호
    2017-38
      Over the last few years the European Union (EU) has been experiencing a number of interconnecting economic, political, social and even geopolitical crises that are threatening its very survival as an effective organization. Given that multilateral organizations often continue long-after their original purposes have been achieved, it is entirely possible that something called the EU will continue to exist. Whether it will resemble the EU at the height of its powers and authority is a very different question, however. In what follows I briefly consider the possible implications of the EU’s reduced status for Asia and its institutional development. This approach is justified by the fact that the EU remains the benchmark against which other regional projects are measured and is – in the opinion of many Europeans, at least – a role model for regional political and economic cooperation. After sketching the EU’s evolution and constitution I consider the forces that have rapidly undermined what had hitherto been seen by many as a deeply embedded, indispensable part of European politics and standard bearer of liberal ‘Western’ values more generally. Finally, I consider what implications its decline may have for other regional projects. Europe’s uniqueness No other region has developed in quite the same way as Europe. Not only was it the first region to institutionalize economic, political and strategic relations, but it did so much more comprehensively and enthusiastically than anywhere else. Indeed, the EU has seen itself as not just the benchmark for regional projects, but also as the standard bearer for liberal political and economic reform more generally. This role was no accident. On the contrary, the EU was encouraged and designed to entrench a particular form of capitalist, free market and – preferably – democratic practices and values in the face of stiff competition from the Soviet Union. While many Europeans may have forgotten about the continent’s geopolitical heritage, and similarly fail to appreciate the pacifying impact of its institutionalized transnational relations, there is little doubt that the EU has been spectacularly successful in fulfilling its original mandate. The continent has been a remarkable success economically, and its values and norms have been transferred – to some extent, at least – to other parts of the region. One of the key reasons that this happened so effectively was that the US encouraged and supported deeper regional cooperation in a way that it did not in East Asia. The key question now is whether the EU can continue to embody, let alone export, such principles when it is losing the confidence of its own people and enjoying little support from the current American administration. Not only does Donald Trump display little understanding of the crucial role the EU has played in underpinning the postwar international order, but the institution itself is also succumbing to the same sort of populist pressures that brought Trump to power in the US. Many Europeans associate the EU with unresponsive, undemocratic, ineffective governance and are hoping for national rather than regional solutions to political and economic problems. Europe’s significance for Asia Regionalism in Europe and Asia are very different and this reflects their distinctive histories, cultures and the preferences of their respective elites. Whereas the European project of deeper integration and greater cooperation was supported by the Europeans themselves and by a ‘hegemonic’ United States, in Asia the region was divided by the Cold war and America’s confrontation with communism. While ever the Cold War continued, genuine regionalism was impossible. Consequently, the US gave active support to a number of regimes that were authoritarian and non-democratic, simply because they were no communist. South Korea, Taiwan, Indonesia and even Singapore and Japan were examples of regimes that enjoyed strong American support despite questionable political practices at times. From the outset, Asia’s institutions were primarily concerned with protecting fragile domestic sovereignty, rather than encouraging EU-style integration. The Association of South East Asian Nations (ASEAN) is the quintessential example of this possibility. Economic development and domestic security have been the principal concerns of policymakers, despite some rhetorical support for political pluralism and emancipation. Indeed, the most striking features of the ASEAN grouping are the distance between rhetoric and reality on the one hand, and the limited impact of the organization itself on the behavior of its members: there has been little enthusiasm for EU-style levels of cooperation, much less developing a powerful inter-governmental organization that might actually compel its members to act in ways that may not suit the region’s political elites. Unfortunately, many of the other organizations that have followed in ASEAN’s wake have subscribed to precisely the same sorts of norms and practices that have characterized ASEAN, with precisely the same sort of consequences. Institutions such as the ASEAN Regional Forum, which ought to be well placed to address critical regional security issues have in reality been incapable of exerting any influence, much less resolving crises on the Korean peninsula, the South China Sea or the Taiwan Straits. The failure and weakness of Asia’s regional institutional architecture has not encouraged reform or a radical change of direction, however. On the contrary, Asia’s institutions are flawed by design, something a proliferation of regional initiatives is unlikely to change. Europe’s lessons Many policymakers in Asia will draw comfort from Europe’s current troubles. The series of economic, political, security and social crises currently afflicting the EU countries not only threatens that institution’s future in ways that would have seemed unimaginable only a year or two ago, but they may also fatally undermine any chance of such institutional innovations occurring elsewhere. After all, the lesson that may be – rightly – drawn is that deep economic integration is simply too difficult without other politically problematic forms of political cooperation, too. It is painfully clear that many Europeans no longer share – if they ever did – the European vision of ever closer cooperation. Given the continuing importance of nationalist forces and beliefs in much of Asia, the real lesson of Europe’s troubles is that far-reaching cooperation is only possible in unusual, possibly unique, circumstances. In the absence of a major existential strategic and ideological threat, and absent the support of the ruling hegemon, the impulse for greater cooperation may also be missing. At a time when authoritarian China seems likely to once again dominate East Asia, and when the US seems may retreat into something like a more insular isolationism, the prospects for effective regional development in Asia have never looked more remote. Mark Beeson is Professor of International Politics at the University of Western Australia. Before joining UWA, he taught at Murdoch, Griffith, Queensland, York (UK) and Birmingham, where he was also head of department. His work is centred on the politics, economics and security of the broadly conceived Asia-Pacific region. He is the co-editor of Contemporary Politics, and the founding editor of Critical Studies of the Asia Pacific.
  • 북한 핵·미사일 위협과 대응방안
    저자
    이춘근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발간호
    2017-31
      최근 들어 북한 핵, 미사일 문제가 전례 없이 크게 부상하고 있다. 끊임없이 지속되는 핵, 미사일 실험들은, 최고 권력자로 등극한 김정은이 이를 총괄하면서 자신의 주요 업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북한은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에도 불구하고 헌법에 핵 보유를 명시하였고, 작년에 개최된 제7차 당대회에서는 핵무기와 경제 병진노선의 지속적 추진을 밝혔다. 심각한 문제는 이러한 위협이 우리의 예상과 대응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심화되고 확산된다는 점이다. 시험 과정에서 수많은 기술적 문제점과 운용 유지에서의 한계를 노출했지만, 북한 정권의 핵과 미사일에 대한 집착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하에 북한의 핵과 미사일이 우리의 안보에 미치는 위협 요인과 대응 방안을 기술적 관점에서 정리해 보았다. 먼저, 탄두 폭발위력이 증가하고 있다. 우리 국방부에서는 제5차 핵실험의 폭발위력을 10kt 정도로 발표했지만, 이는 상당히 보수적인 판단이다. 국내외의 많은 전문가들은 풍계리 핵실험장의 암석 유형과 실험장 조건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폭발위력이 15kt를 넘어선다고 지적한다. 수십만 명이 희생된 히로시마, 나가사키 핵폭탄의 폭발위력에 도달한 것이다. 여기에 제4차 핵실험에서 북한이 수소폭탄이라고 발표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폭발위력이 낮아 무시되었지만, 구소련에서는 부분핵융합에 의한 증폭형 핵폭탄도 수소폭탄이라 지칭한다. 이런 증폭핵탄은 대부분의 핵폭탄 보유국들이 다음 단계로 개발하는 무기이고, 북한이 현 상태에서 충분히 취할 수 있는 방안이다. 북한이 2000년대 초반부터 이에 필요한 리튬6와 중수소(D)를 개발해 온 것이 이를 입증한다. 일반 핵폭탄이 중소도시나 군사목표를 타격하는 전술핵무기라면, 200kt 정도의 증폭핵탄은 어지간한 대도시를 무력화할 수 있는 전략핵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 인구밀집도가 특별히 높은 우리나라 대도시에 5~10발 정도의 증폭핵탄이 떨어지면, 국가 존망의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북한의 핵폭탄을 매 한발, 한발마다 사활을 걸면서 방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증폭형을 넘어 수소폭탄이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둘째로, 탄두 수량이 증가하고 있다. 북한이 플루토늄(Pu)에 의존했을 때는 그 수량이 많지 않았으나, 이제는 원심분리기를 이용해 고농축우라늄(HEU)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우라늄 농축공장은 규모가 작고 전력소모가 작으며 분산이 가능해, 우리가 모르는 장소에 숨기기도 쉽다. 많은 전문가들은 북한이 2020년까지 30~100개의 핵폭탄을 보유할 수 있을 것이라 분석한다. 탄두 수량의 증가와 표준화는 북한이 상당히 다양한 투발수단을 상호 전환하면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SLBM인 ‘북극성 1’과 육상형인 ‘북극성 2’ 등에 동일한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다수의 예비 탄두를 보유해, 선제공격을 당해도 살아남은 투발수단으로 반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증폭핵탄처럼 단일탄두의 폭발위력이 증가하면 이러한 위협이 더욱 가중된다. 셋째로, 방어돌파능력이 향상되고, 핵전술이 다양해지고 있다. 북한은 이미 대량 배치된 노동이나 스커드 미사일 정도의 소형화된 핵탄두를 개발했다고 판단된다. 최근에는 미국에 도달할 수 있는 ICBM을 개발하면서, 우리의 탄도미사일 방어망을 돌파하기 위한 기술도 지속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SLBM과 고체추진제 ‘북극성 2’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로 인해 발사준비시간이 단축되어, 우리의 Kill Chain을 대폭 보완해야할 필요성이 부상하고 있다. 최근의 미사일 시험들은 북한이 고고도 핵폭발 등의 핵전술 고도화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각발사와 탄두의 비대칭 기동에 의한 장시간 고공비행 등이 그 예이다. 고고도 핵폭발은 강력한 X-선과 전자기펄스(EMP)로 인공위성과 레이더, 통신망, IT기기들을 무력화할 수 있어, 21세기의 새롭고 강력한 핵전술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우리와 같이 대도시 집중도가 높은 IT 대국에 특히 위협적인 전술이다. 북한의 핵, 미사일 위협이 가중되는 상황에서 우리의 대응력 부족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북한 핵실험의 사전탐지와 이동식 미사일의 발사 징후 탐지, 고고도 궤도추적에 한계를 보였고, 기술 분석에서도 많은 혼선을 보였다. 핵, 미사일 정보 분석은 사전에 잘 조직되고 훈련된 과학기술자 집단과 이들 간의 협업, 장기적인 학습이 필요한데, 현재 우리 상황은 그렇지 못하다. 과학기술은 원리를 알면 아주 다양한 기술개발 경로를 채택하면서 이를 은폐할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의 기술개발 경로를 파악하지 못하면서 그들이 보여주는 것을 뒤따라가며 세우는 대안은 그리 효과적이지 않다. 우리 무기체계는 10여년의 장기계획으로 추진되어 중간에 변경하기 어렵다. 자칫하면 미군이 미사일 성능을 과신한 나머지 기관포를 뗀 팬텀기를 월남전에 투입했다가 커다란 낭패를 당한 것과 같은 우를 범할 수 있다. 이제 국면을 전환해야 한다. 정보 수집, 분석을 외국에 의존하며 북한이 보여주는 것을 뒤따라가는 대책으로는, 국력을 동원해 빠르게 확장되는 북한의 핵, 미사일 위협을 막을 수 없다. 홍수를 막으려면 기상예측을 강화하고 댐을 건설하지 않는가? 따라서 당장 필요한 피해방지 대책을 세우는 한편으로, 미래를 예측하고 앞서 나가서 장벽을 쳐야 한다. 1957년의 스푸트니크 충격에 대한 미국의 대응사례를 보자. 소련의 수소폭탄 공격 위협에 노출된 미국은 대통령 직속으로 위원회를 만들고 항공우주국(NASA)을 창설해 기술 개발에 주력했으며, 학교 교육을 대대적으로 개선해 기초과학을 육성했다. 결국 1972년에 미·소우주협력협정이 체결되고, 대화를 통한 긴장해소의 길이 열렸다. 이를 교훈 삼아 몇 가지 대안을 제시한다. 먼저, 정권 차원에서 기구를 정비해 북한의 핵, 미사일 위협에 대응해야 한다. 먼저, 북한의 국방과학 전반을 조망하고 정보 수집을 대폭 강화하며, 전문가 네트워크를 확충해야 한다. 특히 우수 청년 인력들을 양성하고, 이들이 장기간에 걸쳐 경험을 쌓고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이를 통해 자주적인 분석과 대응 능력을 확충해, 적어도 북한 문제에서만큼은 우리가 세계를 선도해야 한다. 다음으로, 다층, 다방면의 복합 방어망을 확충하고 연동해야 한다. 북한의 핵능력과 핵전술이 날로 고도화하고 있는데 비해, 우리의 탄도미사일 방어는 저고도에 국한되고 수량이 부족하다. 따라서 이를 다층, 다방면으로 확충하고 연동해야 한다. 우리 무기가 완벽하지 않지만, 북한 핵미사일 역시 많은 전술적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의 장점을 살리고 약점을 보완하면서 상대의 약점을 노려, 그 전술적 운용 능력에 제약을 가하고 도발 의지를 꺾어야 한다. 셋째로, 미래 기술 개발 추세를 따라잡아 북핵을 근원적으로 방어할 길을 찾아야 한다. 선진국들은 차세대 발사체와 고고도 항공기, 무인기, 인공위성 등의 플랫폼을 개발하고 여기에 관측설비와 레이저, 미사일 등을 탑재해, 적의 미사일을 부상단계에서부터 요격하는 방안을 찾고 있다. 우리도 종심이 짧은 한반도의 특성을 잘 활용하면, 이스라엘처럼, 저렴하고 성능이 우수한 차세대 방어체계를 개발할 수 있다. 넷째로, 대화 국면에서도 살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북한에 들어가는 기술과 물품 중에서 대량파괴무기로 전용될 수 있는 것들을 철저히 구별하는 작업을 선행해야 한다. 북한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에서 수많은 제재 품목들을 별도로 지정하고 있으므로, 이와 연동하는 방안도 찾아야 한다. 이러한 사전 조치 없이 성급하게 북한을 지원하면, 국제적 규제를 우리가 위반하게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민군 기술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고도의 전문지식이 필요한 핵, 미사일 분야는 군과 민의 유기적인 협력이 필수적이다. 북한이 “우리 과학자들이 개발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이보다 월등히 우수한 연구자들과 인프라를 구비하고 있다. 정치권을 포함한 각계에서 우리 과학기술계를 체계적으로 지원한다면, 조기에 충분히 북한을 압도할 수 있다. 어쩌면 이를 통해 북한을 대화의 길로 유도하고, 통일을 앞당길 수도 있겠다. 現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서울대학교 섬유고분자공학과 공학박사, 중국 북경사범대학 국제 및 비교교육연구소 교육학박사를 취득. 한중과학기술협력센터 수석대표를 지냈으며, 주요연구로 「북한의 과학기술인력 현황분석과 협력과제」(이춘근 외)(2016), 「고고도 핵폭발에 의한 피해유형과 방호대책」(이춘근 외)(2016), 「과학기술로 읽는 북한 핵」(2005), “Nuclear Technology and Associated Human Resources in North Korea”(2008) 등 다수.
  • 디지털 시대의 민주주의: 개방적이고 유연한 정부를 위한 제안
    저자
    장 뱅상 플라세 (前 프랑스 국가개혁담당 장관)
    발간호
    2017-32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는 저의 이야기를 아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제가 처음 한국을 떠났을 때가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프랑스 가정으로 입양될 때였습니다. 그 이후 마지막으로 제가 한국을 떠난 것은 프랑스 내각의 국무장관으로서 지난 6년간 여러 차례 한국을 공식 방문한 이후였습니다. 가장 최근에 한국에 온 건 3개월도 채 안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국가개혁·간소화 담당 국무장관이었습니다. 그 이후 잘 아시겠지만 프랑스에서는 대선이 진행되었고 내각이 새로이 구성되었습니다. 상원의원의 자리로 돌아갈 날을 며칠 앞두고 존경하는 원희룡 도지사님의 초청으로 이 자리에서 전임 장관으로서의 경험에 대해 말씀 드리게 된 것은 크나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께서 정부 내, 지방자치단체, 기업, 사용자들과의 관계 현대화를 위해 3년 전부터 추진한 ‘간소화의 충격’을 이어가기 위해 지난 2016년 2월 내각에 입문했을 때 이를 두고 주변에서 참 많은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좋게는 ‘힘내!’부터, 나쁘게는 ‘힘내……’까지. 요컨대 ‘미션 임파서블’이라는 것이었죠. 자랑하고자 드리는 말씀은 아니지만 전임자 두 분과 함께 지난 정부에서 저희는 간소화를 위한 800여 건 이상의 정책들을 추진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는 정치적인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제가 몸담고 있던 정부에서 시민사회를 미래의 동반자로 선택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그 시민사회의 대변자들입니다. 그렇게 디지털 ‘프로세스’가 도입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종종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곤 합니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질문이죠. 제 얘기에 미소 짓는 분들께서 계시는데, 저는 진지하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이 경영하는 회사에서 개발하는 기술, 연구 및 애플리케이션이 결국 우리 미래 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수정하고 완성해냅니다. 여러분들의 어깨에 놓인 책임감이 느껴지십니까? 저는 지금 웃으면서 말씀드리지만 진지합니다. 이제 모든 것은 움직임입니다. 물론 과거에도 그랬죠. 하지만 지금 그 움직임은 가속화되었습니다. 과거에 인간은 50년 후 자기가 살고 있는 마을이 어떻게 바뀔지 어느 정도는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누가 앞으로 10년 후 자신의 일상이 어떻게 바뀔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요? 좀 전에 제가 말씀드린 ‘닭이냐, 달걀이냐’의 문제로 다시 돌아온다면, 국가개혁·간소화 담당 국무장관으로서의 경험 덕분에 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의 세상이 ‘취약’한 것이 아니라 ‘재발견’해 나가야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미래를 두려워할 필요 또한 없는 것입니다. 기업체들의 기술과 선택이 우리 일상에 변혁을 가져올 뿐 아니라 정부 조직 다시 말해 공공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인터넷은 정보의 가속화를 가져왔습니다. 적어도 정보의 확산에서 그렇습니다. 아니 어찌 보면 정보 확산의 가속화로 인해 ‘실시간’으로 소위 새로운 액션이 만들어지고 그 자체가 새로운 정보원이 되는 것 아닐까요? 결국 다시금 ‘닭이냐 달걀이냐’의 문제로 되돌아옵니다. 이와 같은 시간의 가속화로 인해 우리의 민주주의도 변화하게 됩니다. 이를 탓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신기술의 도입으로 우리의 사회가 변화하였고 무엇보다 시민들인 사용자와 행정 관청의 관계도 변화하였습니다.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멸을 의미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에게는 경제적인 의미, 저희에게는 정치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저는 지난 12월 파리에서 ‘열린 정부 파트너십(OGP: Open Government Partnership)’ 회의를 공동 주최하면서 80여 개의 정부 및 수백 명의 기업체 대표들을 모시고 다양한 사안에 대해 논의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물론 지금도 저는 웃고 있지만 당시 그 사안들은 진지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상당히 진중한 문제들이었습니다. 프랑스 대선 기간 동안 우리는 민중을 선동하는 자들과 민주주의의 적들이 신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지난 몇 달간 목격한 바 있습니다. 특히 페이크 뉴스라고 부르는 가짜 뉴스는 빛의 속도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상에서 확산되었습니다. 조금만 경계를 늦춰도 선거의 진정성이 훼손될 수 있습니다. 이는 민주주의 자체의 훼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 새로운 가능성은 고귀한 의미로 우리 사회를 위해 역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파나마 페이퍼스’ 사건을 일례로 들 수 있습니다. 열린 정부 파트너쉽 회의에서 프랑스가 의장직을 수행하면서 각 국가들이 디지털 시대에 적응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역설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지난 2011년 오바마 대통령의 발의로 발족한 OGP는 디지털의 원칙과 툴을 활용하여 정부 투명성 증진, 시민권한 부여, 부패 척결을 위해 탄생한 국제기구입니다. OGP는 회원국 내에서 독립적인 평가를 통해 비전 실천을 위한 행동강령을 채택함으로써 공권력과 시민사회 간 원활환 소통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앞서 강조했듯이 현대시민은 점차 더 민주주의 논의 과정에 일조하고 공공정책 수립에 참여하고자 합니다. 이와 같은 욕구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수월해졌습니다. 정보의 공유가 원활해졌고 시민과 공공기관 주체 간에 새롭고도 직접적인 상호작용이 증진되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인으로서 저의 임무 중 하나는 신뢰할만하며, 지속가능하면서 효율적인, 그러면서도 공공정책에 지나치게 부담을 주지 않는 솔루션을 여러분들의 기업에서 찾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재생, 투명성, 혁신이라는 요구 조건에 정부가 어떻게 응답했는지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최근의 ‘디지털 공화국을 위한’ 법률은 협의과정을 거치면서 정부에서 제출한 법률안에 추가사항들이 덧붙여졌습니다. 의회 심의를 거치는 2차 협의과정 결과, 새롭게 5개 조항 및 90여 개의 수정사항이 도출되었습니다. 총 2만 명의 사람들이 본 협의과정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경험들은 선출직 의원들로 대표되는 대의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동시에 직접민주주의의 일부를 수용함으로써 시민과 그리고 이들이 선출한 대표자들 간의 소통에 활력을 불어넣어줍니다. 시민들의 요구가 반영된 만큼 법률안의 정당성은 더욱 더 보장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올랑드 정부에서 처음 시작된 본 제도가 앞으로도 이어지리라 확신합니다. 프랑스와 같이 규범이 우선시되는 국가에서 이는 특별한 함의를 지닙니다. 규범적 문화에서 영향 및 평가 중심의 문화로의 이행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향후 몇 년간 간소화를 담당하게 될 실무진들의 업무가 될 것입니다. 저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움직임은 시작되었고 이미 자리를 잡았습니다. 언론에 따르면 우리는 이와 같은 성공의 이면을 벌써 경험하고 있습니다. 프랑스 국민들은 우리가 더 신속하게 행동을 취하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걱정할 필요 또한 없습니다. 유럽 이웃 국가들 중 현대화의 길에 들어선 국가들 역시 동일한 ‘조바심’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작년 말 독일 방문 시 접견한 독일 측 장관은 평가의 문화로 이행하는 데 독일의 경우 거의 10년이 걸렸으며 그 과정에서 강한 저항에 부딪힌 바 있다고 토로했습니다. 프랑스의 경우 이 모든 것이 시작된 지 채 몇 년 안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에너지와 창의성을 보존하고 증폭시켜 각자 서 있는 자리에서 이와 같은 변화의 동반자가 될 것을 제안합니다. 현대화를 21세기 민주주의, 성장, 경쟁력의 지렛대로 삼아 수십억의 이윤을 창출하고 더욱 더 경쟁력 있는 디지털 정부를 만들기를 제안합니다. 前 프랑스 국가개혁·간소화 담당 국무장관(2016-2017). 밀라노국제식품박람회 정부 특사(2015), 상하이세계박람회 파리-일 드 프랑스-파리상공회의소 공동관 관장(2010)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프랑스 에손 주 상원의원으로 프랑스 녹색당 상원 원내대표를 맡고 있음. 주요 저서로 『Pourquoi pas moi (나라고 안 될 이유가 없지!)』(2014) 가 있음.
  • 신정부 중견국 외교를 위한 제언
    저자
    손열 (연세대학교 교수)
    발간호
    2017-49
      지난 박근혜 정부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책임 있는 중견국 외교 등 다양하고 화려한 구호를 내걸었으나 결과는 초라했다. 북핵 문제를 풀기위한 미‧중 양대국과의 외교, 역사 문제를 둘러싼 일본과의 줄다리기에 몰두하여 남북관계 개선, 지역협력의 주도권 확보, 글로벌 다자외교 활성화 등에 제대로 투자하지 못하였고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물론 대통령과 외교수장은 글로벌 무대나 지역 무대에 빠짐없이 참석하였지만 그 존재감은 크지 않았다. 이들 무대는 국가 간 집합적 이익(지역의 평화와 번영 등)을 규정하고 질서를 조성, 관리하는 공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무대 주변에서 자국의 문제(북핵)를 해당국과 논의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국제무대에서 한국이 강대국처럼 확장된 국익 개념을 바탕으로 행동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약소국처럼 협소하게 규정된 국익 개념 하에 활동하는 것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한국은 이미 덩치가 많이 커졌고 우리에 대한 타국의 기대나 시선도 크게 달라졌다. 한국은 북핵과 북한 문제라는 숙명적인 외교적 숙제를 안고 있어 그 해법에 주력하는 것은 타당하나 이제 한국의 국가 이익은 커진 덩치만큼이나 다면적이고 복합적이기 때문에 이에 걸맞은 외교를 펼쳐야 한다. 필자를 포함한 일군의 전문가들은 “중견국 외교(middle power diplomacy)”의 필요성을 강조해 왔다.1) 한국은 국익 실현을 위해 세력권을 형성할 강제력이나 유인력을 가진 강대국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국의 안보를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따라서 타국의 눈치를 보며 목전의 이익에 몰두하는 약소국도 아니다. 중견국 외교란 ➀ 보다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시점에서 국익을 계산하고, ➁ 물리력의 행사뿐만 아니라 지식과 매력, 외교술 등 소프트파워 자원을 동원하며, ➂ 강대국 사이 혹은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서 중견국의 위치적 이점(positional advantage)을 십분 활용하는 네트워크 외교를 수행하고, ➃ 국제규범 제정에 역점을 두어 규칙 기반의 국제질서를 조성, 운영하는 외교라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중견국 외교는 지난 정부의 구호 중 계속 살려나가야 할, 몇 안 되는 전략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국제정치의 장에서 중견국의 지위는 상승하고 있다. 21세기 국제질서는 국가 간 물리적 힘의 균형뿐만 아니라 무엇이 정당하고 소망스러운 질서인지를 규정하고 타국으로 하여금 수용하게 하는 규범적 요소를 담고 있기 때문에 강대국의 물리적 강제력이나 유인력만으로는 질서가 형성되고 유지되지 않는다. 아태지역의 경우, 미국과 중국 어느 쪽도 군사력과 경제력만으로 지역 질서 주도권을 잡지 못하는 가운데, 역내 국가들의 동의를 얻어낼 만한 콘텐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견국의 기회구조가 열리고 있다. 미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래 아태지역 질서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공공재를 제공해 왔으나, 트럼프 행정부 들면서 “미국 우선주의” 구호 하에 자국의 이익만을 좇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아태지역에 자유주의 경제 질서를 조성하는 환태평양동반자협정(TPP)로부터 일방적으로 탈퇴하고 자국의 비대칭적 힘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양자주의 거래로 전환하는 한편, 안보에 있어서는 기존의 동맹 네트워크를 거래중심적으로 운용하여 동맹국의 근심을 사고 있다. 자국 우선주의 원칙 하에서 아태지역 질서를 어떻게 수정해 갈 지에 대한 방향성을 보이지 못하고 있어 미국의 위신(prestige)은 현저히 약화되고 있다. 반면 중국은 미국이 자초하고 있는 리더십 공백을 메우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트럼프 미국의 경제민족주의에 대항하여 경제 세계화와 자유무역의 기수를 자임하고, 친성혜용(親‧誠‧惠‧容), 신형주변국관계, 운명공동체 등 화려한 수사를 동원하여 대안적 지역 질서를 모색해 왔지만, 사드(THAAD)배치 문제나 남중국해 사례에서 보듯이 지역의 집합적 이익보다는 자국의 핵심이익을 추구하는 데에서 한 발짝 양보도 허락하지 않는 완강함을 보이며 주변국을 불안케 하고 있다. 중국이 부상하는 물리력에 상응하는 위신, 즉 지역 질서를 주도할 만한 권위와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은 지역 질서가 강대국 정치 논리, 즉 강대국 간 세력 각축과 균형으로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중견국과 약소국의 이해를 담는, 보다 다원적이고 탄력적이며 거버넌스적인 질서로 변환하도록 중추적 중견국으로서 역할을 부과 받고 있다고 할 것이다. 사실 2010년대 들면서 한국은 미‧중 패권경쟁의 단층선에 위치한 관계로 여러 난처한 상황을 겪어 왔다. 미국이 주도한 TPP 교섭에 중국의 반발로 참여를 주저한 측면이 있고, 중국이 주도한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는 경제적 메리트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부정적으로 나옴에 따라 참가를 주저하다 출범 직전 막차를 탄 바 있다. 사드배치 문제의 경우, 미중경쟁 구도 속에서 주체적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온 것도 사실이다. 이렇듯 양자택일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눈치 보기와 단기대응을 넘어서 국제규범과 원칙에 근거해 외교관계를 설정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AIIB, TPP, 사드 문제는 일차적으로 한미‧한중 관계 역학을 고려하되 개방성, 투명성, 다자주의 가치를 준거(準據)로 하여 정책결정을 내리고 원칙론, 명분론으로 정당화할 수 있었다. 국제규범과 규칙에 기반을 둔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조성하여 주요 외교 사안들이 미중의 패권 경쟁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국제협력, 다자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국가정체성을 만들어 가야 한다. 비근한 예로 아태지역 주요국들이 견지해 온 “정경분리원칙”을 들 수 있다. 정치적, 안보적 이유로 상대국에 경제적 보복을 하지 않는 국제규범으로서 중국은 그 최대 수혜자이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중국은 센카쿠(다오위다오) 분쟁이나 사드배치 논쟁처럼 안보 이슈로 관리무역을 통한 보복운동을 전개해 왔다. 정경분리원칙을 제창해 온 일본도 최근 부산 위안부 소녀상 설치에 대한 보복으로 양국 간 통화스와프 논의를 일방적으로 중단시켰다. 미국 역시 중국의 북한 압박을 추동하기 위해 중국에 무역보복 위협을 가하고 있다. 강대국이 안보이익 실현을 위해 경제적 압력을 행사하는 외교행태는 아태지역의 자유주의 경제 질서를 위협하여 경제적 압박 수단을 보유하고 있지 못한 역내 중견국 및 약소국의 안정과 번영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한국이 정경분리원칙 준수를 위한 중견국 간 협력외교, 규범외교를 주도할 필요와 기회가 있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외교층위를 확대하여 국익을 추구하려는 방향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특히, 다자 무대에서 “책임”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적 외교성향을 띠고 있다. 당면한 북핵 위기를 극복하려는 단기적 노력과 함께 자유주의 지역 질서를 설계하고 건축하는 장기적 노력을 병행할 때 한국의 국익이 확보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그에 걸맞은 중견국 외교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 1)손열, 김상배, 이승주 편, 『한국의 중견국외교: 역사, 이론, 실제』 (오름 2016). 現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同대학교 지속가능발전연구원장, 외교부 정책자문위원. 연구분야는 일본 및 국제정치경제, 동아시아국제정치, 공공외교이며, Japanese Industrial Governance, 『일본: 성장과 위기의 정치경제학』 『동아시아와 지역주의』(편저) 등 다수의 저술이 있음.
  • Myanmar-DPRK’s “Marriage of Convenience”–Headed for Divorce?
    저자
    Andray Abrahamian & Wai Moe
    발간호
    2017-50
      North Korea’s relationship with Myanmar1), especially from the U.S. perspective, is troubling. Ambassador Joseph Yun, US Special Representative for North Korea Policy, visited Myanmar in July to press the government to sever its ties with Pyongyang. During trips in May and August, US Secretary of State Rex Tillerson pressed all ASEAN members to further isolate the North as well, in an effort to bring Pyongyang back to the negotiating table. Military-to-Military Cooperation Throughout the 2000s, North Korean military technicians were reportedly spotted in central Myanmar along the banks of the Irrawaddy River where several of the Tatmadaw’s military factories are located as well as missile factories pursuing Scud-type technologies.2) Residents of the Min Hla Township said they saw North Koreans while the military was building a new factory there, most recently in late 2013 and early 2014 when the military factory was being completed. The North Koreans’ propensity for discretion is notable: a storeowner at the main market in the township recalled that “North Koreans only came to the market on Sunday for shopping. Usually, they didn’t come to the town, just staying inside military compounds.3)” North Koreans, some the world’s best tunnelers (having learned during the Korean War to put everything of value underground), also appear to have assisted Myanmar in designing a vast network of tunnels under Naypidaw, connecting key pieces of infrastructure.4) Naypyidaw is Myanmar’s built-from-scratch capital city that was unveiled in 2006 and the underground connectivity is thought to contribute to the military’s defensive strategy for the city. The connected military facilities also form something of a ring around the civilian buildings, which are closer to the center, a design both symbolically and strategically useful.5) Due to extensive tunneling cooperation in key areas around Myanmar and some assertions made by the exile community, it has long been rumored that North Korea has been assisting Myanmar in a nascent nuclear program as well. However, similar to North Korea, Myanmar has a long tradition of opacity in decision-making, which means that a certain amount of guesswork is inevitable. Unlike North Korea, however, Myanmar also has a tradition of political gossip and leaks that seep out to the outside world. Enough information was gathered by the Democratic Voice of Burma, for example, to sponsor a report in 2010 that concluded:   [I]t is likely that Burma is trying to attempt many of the nuclear program steps reported by previous sources. Unrealistic attempts, such as the Molecular Laser Isotope Separation project, unprofessional engineering drawings and the crude appearance of items in photos, suggest that success may be beyond Burma’s reach.6)     The same report concluded that evidence of collaboration with North Korea on the nuclear program was scant, though “the rumored activity… should be taken seriously.7)” It appears as if Myanmar’s nuclear exploration, if true, was half-hearted, at best. Change and Continuity In 2009, it was leaked that the then third-highest ranking general in Myanmar, Shwe Mann, had traveled to North Korea and toured missile facilities in November 2008. This was a significant leak, with many details including site visits (weapons and radar factories and a missile launch site) and the signing of a Memorandum of Understanding by Shwe Mann and North Korean General Kim Kyok Sik on expanding military ties.8) The North Koreans supposedly tightened up the rules around bilateral affairs in response to this incident and their visitors’ relative lack of discretion. Myanmar delegations are no longer allowed to take photos during their trips to military factories and other sensitive venues. Visitors since then state they’ve had to draw what they’d seen in North Korea from memory.9) Meanwhile, Senior General Than Shwe passed over Shwe Mann and chose General Thein Sein as his successor in part—it is rumored—because of disagreements over how close Myanmar should be to the DPRK; Shwe Mann supposedly argued that ties were too close. Yet Thein Sein went on to lead the country towards rapprochement with the United States and the world, then gracefully gave way when his party was trounced by Aung San Suu Kyi’s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 in 2015. Throughout this period, US officials at all levels have made clear to their Myanmar interlocutors that they want to see DPRK-Myanmar military ties cut. The US Treasury even put DPRK Ambassador Kim Sok Chol on the Specially Designated Nationals list the day after the NLD won the election to signal intent. (Kim left the country soon thereafter.) Most Myanmar officials today insist the relationship is over. The close military-to-military relationship in the 2000s “was a marriage of convenience,” one official said during the Myanmar-US/UK Nonproliferation Dialogue in December 2016. “We didn’t have many friends, and they needed rice and we needed weapons! Now things are totally different.” Some observers of the two countries are unconvinced, however, especially since sensitive information is siloed in both countries so most Myanmar officials, even in the military, aren’t in the know. The US intelligence community sees enough to still be worried and American envoys and diplomats still beseech Myanmar to stop military imports. It is unclear the degree to which this is working. Moreover, a number of Myanmar businesspeople and companies remain under suspicion for facilitating transfers of funds and of military material between the two countries even during the democratic transition. After all, businesses who owe much of their wealth to their connections to the military are still in some sense beholden to the Tatmadaw. One formerly sanctioned tycoon, Tay Za, in particular, noted that any businessman in Myanmar cannot resist if the state asks them to help transfer money to North Korea or anyone else. Tay Za attended a military elite school of the Defense Service Academy but dropped out and later built his fortune on extremely favorable concessions in teak. He is known to have helped modernize Myanmar’s military by finding arms vendors, and played a key role in Myanmar’s purchase of MiG 29s and air defense systems from Russia. Tay Za came under scrutiny in 2014 for allegedly transferring $320 million to a North Korean company before and during Thein Sein’s presidency. (He insists he just transferred the money to a bank in China and had no connection to the DPRK.10)) Other trade may be more benign, though it is difficult to tell. One company alleged to be involved in DPRK trade is the UMG Group. According to the company’s official webpage, it is involved in distribution, education, food, financial services, entertainment, healthcare, property & infra development and IT & telecommunication. It is unclear what it sells to or imports from the DPRK. The chairwoman owned the house that Aung San Suu Kyi lived in in Naypyidaw from 2012 to 2016. Myanmar certainly respects some of North Korea’s sensitivities more than most countries. For example, in 2010 Ambassador Kim Sok Chol and his staffers were involved in seizing a biography of Kim Jong Il by a Burmese author off the shelves of bookstores. North Korean diplomats also worked with local police to get DVD vendors on the streets of Yangon to get rid of copies of the movie The Interview. It is difficult to imagine North Koreans getting this kind of cooperation in most countries. How much cooperation continues on military matters is largely up to the Tatmadaw, which is still outside the control of the civilian government. Relations between Naypyidaw and Yangon appear to remain good. Nonetheless, Pyongyang must worry that someday the United States and others will pry the Myanmar military fully away from its relationship with the Korean People’s Army. It seems as if the Korea Mining Development Trading Corporation -connected and treasury-designated individual Kim Chol Nam was asked by Naypyidaw to leave Myanmar in June after US pressure, for example. Given the opacity of decision-making by the Myanmar military, it is difficult to assess how successful Washington might be in this goal. It is hard to even understand to what degree—if at all—cooperation between the two militaries has been reduced or even how substantial it was before Myanmar’s transition process began. Given the lengthy process of unraveling U.S. sanctions on Myanmar between 2012 and 2016, it is unlikely that significant sanctions pressure will be re-applied to Naypyidaw. Neither can Washington offer much in the way of military cooperation as long as wars rage in the Shan and Kachin States and a harsh crackdown on the Muslim population of Rakhine continues. It is largely up to the Tatmadaw to decide what to do with their “marriage of convenience” to Pyongyang. - 1) “Burma” was renamed “Myanmar” in 1989; “Rangoon” was renamed “Yangon.” 2) Bertil Lintner, Myanmar, North Korea in missile nexus, Asia Times Online, March 2, 2011. http://www.atimes.com/atimes/Southeast_Asia/MC02Ae01.html. 3) Author interview in Min Hla, April 2016. 4) Bertil Lintner, Tunnels, Guns and Kimchi: North Korea’s Quest for Dollars – Part I North Korea digs tunnels for Burma’s brutal, secretive regime, YaleGlobal, June 9, 2009. http://yaleglobal.yale.edu/content/NK-quest-for-dollars-part1. 5) Dulyapak Preecharushh, "Myanmar's New Capital City of Naypyidaw" in Engineering Earth: The Impacts of Megaengineering Projects, ed. By Stanley D. Brunn (New York: Springer, 2011), 1029. 6) Ali Fowle and Robert E. Kelley, Nuclear Related Activities in Burma, DVB Report, May, (2010): 33. 7) Ibid. 27. 8) "Burma, North Korea Said To Expand Military Ties", Radio Free Asia, February 2, 2009. http://www.rfa.org/english/news/myanmar/nkorea-07012009231914.html. 9) Author interviews with senior officials in Naypyidaw, 2017. 10) Author interviews with Tay Za, July 2014. *An earlier version of this issue of JPI PeaceNet, was published in 38NORTH on August 25, 2017. - Andray Abrahamian is a Visiting Fellow at the Jeju Peace Institute. He previously taught at Ulsan University and was Executive Director of Choson Exchange, a non-profit that trains North Koreans in entrepreneurship and economic policy. He has written a forthcoming book comparing the DPRK and Myanmar. - Wai Moe is a reporter for The New York Times on Myanmar issues and freelance writer for other publications. Before joining The Times in 2012, he worked with The Irrawaddy magazine. He spent five years in jail as prisoner of conscious in the 1990s.
  • 미얀마와 북한: 편의적 협력관계는 끝날 것인가?
    저자
    안드레이 아브라하미안 & 와이 모
    발간호
    2017-51
      북한과 미얀마1)의 관계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특히 골치거리이다. 미국의 대북정책 특별대표 조셉 윤(Joseph Yun) 대사는 7월에 미얀마를 방문하여 미얀마 정부에 평양과의 관계를 단절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5월과 8월에 방문한 미 국무장관 렉스 틸러슨(Rex Tillerson)도 평양을 협상 테이블로 복귀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모든 아세안 회원국들에게 북한을 더욱 고립시키도록 압력을 가했다. 군사 협력 2000년대에 걸쳐, 스커드 미사일 기술을 개발하고 있는 미사일 공장뿐만 아니라 미얀마 군부(Tatmadaw) 의 몇몇 군수 공장이 자리 잡고 있는 이라와디(Irrawaddy) 강둑을 따라 미얀마 중심지에서 북한의 군사기술자들을 목격했다는 보고들이 있었다.2) 민흘라(Min Hla) 지역 주민들은, 군부가 그 곳에서 새 공장을 짓는 기간 동안, 가장 최근에는 공장의 완공을 앞둔 2013년말과 2014년초에, 북한 사람들을 보았다고 했다. 북한 사람들의 조심성은 유명해서, 지역 내 주요 상점 주인에 따르면 "북한 사람들은 물건을 사러 일요일에 상점에 올 뿐, 대개는 군 부대 내에서 머물고 시내로 나오지 않았다.3)" 북한 사람들은 한국전 당시 모든 귀중품을 지하에 보관하는 방법을 터득한 세계 최고의 터널 전문가로서, 미얀마가 네피도(Naypidaw) 지하에 방대한 터널 망을 설계하고 주요 기반시설들을 연결하는 것을 지원해온 것으로 보인다. 4) 네피도는 미얀마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만든 수도로서 2006년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지하 연결성이 도시의 군사적 방어전략에 기여할 것으로 추측된다. 연결된 군사 시설들이 도심에 보다 가까운 민간 빌딩들 주위를 반지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는데, 이는 상징적으로나 전략적으로 유용한 설계이다.5) 미얀마 핵심 지역들에서의 대규모 터널공사 협력과 망명자 커뮤니티의 주장들로 인해, 초기 단계의 핵 프로그램에서도 북한이 미얀마를 지원해 왔다는 소문이 오랫동안 나돌았다. 한편, 북한과 마찬가지로 미얀마는 불투명한 정책결정의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어, 어느 정도의 추측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북한과는 달리 미얀마는 전통적으로 정치적 소문이 외부로 새어 나왔다. 예를 들면, '버마의 민주적 목소리(the Democratic Voice of Burma)' 가 수집한 충분한 정보로 만들어진 2010년의 한 보고서는 다음의 결론을 내렸다: 버마는 이전 자료들이 보고한 대로 핵 프로그램의 많은 단계들을 시도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분자레이저 동위원소 분리 프로젝트, 비전문적 공학 도면과 사진 속 물건들의 조잡한 외관 등이 보여주는 비현실적 시도들은, 버마의 성공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말해준다.6)   동일한 보고서는, "소문에 들리는 활동은…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지만7)" 핵 프로그램에 관한 북한과의 공동 작업의 증거는 희박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마치 미얀마가 핵을 탐구한다고 하더라도 기껏해야 미온적인 것일 뿐이라는 식이다. 변화와 연속성 2009년에, 미얀마 서열 3위 장군이 쉐 만(Shwe Mann)이 2008년 11월에 북한을 방문하고 미사일 시설들을 둘러 보았다는 정보가 새어 나왔다. 무기 및 레이더 공장과 미사일 발사 부지를 방문하고, 쉐 만과 김격식이 군사적 유대관계를 확대하는 양해각서에 서명했다는 것을 포함한 많은 구체적인 정보들이 담긴 중대한 누출이었다.8) 북한은 이 사건 및 방문자들의 조심성 부족으로 인해, 양국 관계에 대한 규칙을 강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얀마 대표단은 방문기간 중에 군수공장과 다른 민감한 장소에서의 사진 촬영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 그 후로 방문자들은 북한에서 본 것을 기억했다가 그려야 했다고 진술하고 있다.9) 이 와중에, 상급자인 탄 쉐(Than Shwe) 장군이 쉐 만을 내치고 떼인 세인(Thein Sein) 장군을 부분적인 후계자로 선택하였는데, 소문에 따르면, 이는 미얀마와 북한의 관계에 대한 의견차이 때문이라고 한다. 쉐 만은 관계가 너무 가깝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떼인 사인은 미국과 세계와의 화해모드로 국가를 이끌었으며, 그의 정당이 아웅산 수지(Aung San Suu Kyi)의 민주민족동맹(NLD)에 의해 2015년에 완패하자 기품있게 정권을 양도했다. 이 기간에 걸쳐, 미국의 모든 관료들은 미얀마의 대화상대자들에게 북한- 미얀마 관계의 청산을 원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미 재무부는 심지어 그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 민주민족동맹이 선거에 승리한 다음날 김석철 북한대사를 특별지정 제재대상(SDN) 리스트에 올려놓았다. (김석철은 곧바로 미얀마를 떠났다.) 오늘날 대부분의 미얀마 관료들은 이 관계가 끝났다고 주장한다. 2016년 12월 미얀마, 미국, 영국의 비 핵확산 회의 기간 중에, 한 관료는 2000년대의 밀접했던 군사적 관계가 "정략 결혼"이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친구가 많지 않다. 그들은 쌀이 필요했고 우리는 무기가 필요했다. 지금은 사정이 아주 다르다." 하지만, 두 나라에 대한 일부 관측자들은 이를 믿지 않는다. 민감한 정보는 양국에서 드러나지 않고 있어서, 대부분의 미얀마 관료, 심지어 군부 관료조차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미국 정보 관계자들은 아직도 충분히 우려할 만하다고 보고, 미국의 특사와 외교관들은 여전히 미얀마에 군사물자 수입을 중단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것이 어느 정도 작동하고 있는지는 불확실하다. 더군다나 수많은 미얀마 사업가와 회사들이 민주적 전환기에도 양국간 자금 및 군사물자 이전을 맡고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재산의 상당부분을 군부와의 연관으로 마련한 사업가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여전히 미얀마 군부의 신세를 지고 있다. 예전에 제재를 받은 거물 따이 자(Tay Za)는 특히, 미얀마에서는 어떤 사업가도 국가가 북한이나 다른 누구에게 자금 이전 협조를 요청하면 거절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 따이 자는 군 간부 학교인 국군사관학교(the Defense Service Academy)를 중퇴하고, 이후 티크 목재사업의 엄청난 특권을 통해 부를 쌓았다. 그는 무기상을 찾아 미얀마 군의 현대화를 지원하고, 러시아로부터 미그29기와 공중방어 시스템을 구입하는데 핵심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이 자는 2014년에 정밀 조사를 받았는데, 떼인 사인의 대통령 집권 시기 및 그 이전에 북한 회사에 320만불을 이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는 돈을 단지 중국에 있는 한 은행에 이전했으며, 북한과의 연관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10))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말을 더 잘 듣는 다른 무역거래가 있을 수도 있다. 북한과의 무역에 연관되어 있다고 전해진 한 회사는 UMG그룹이다. 회사의 공식홈페이지에 따르면, 회사는 유통, 교육, 식료품, 금융서비스, 오락, 건강, 부동산 & 기반시설 개발, IT & 통신 분야를 취급한다. 북한으로부터 무엇을 사고 팔았는지는 확실치 않다. 회장은 아웅산 수지가 네피도에서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살았던 집을 소유했다. 미얀마는 확실히 다른 대부분의 나라들보다 북한의 민감한 부분을 존중한다. 예를 들어, 2010년에는 김석철 대사와 그의 직원들은 어느 버마 작가가 쓴 김정일 전기를 서점에서 압류하는데 관여했다. 또한 북한 외교관들은 '인터뷰'라는 영화의 복사판을 없애기 위해 지방 경찰과 함께 양곤(Yangon) 시내의 DVD 판매상들을 단속하기도 했다. 군사적 사안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협력이 지속되고 있는가는 미얀마 군부에 달려 있지만, 이는 여전히 민간 정부의 통제 밖에 존재한다. 네피도와 양곤의 관계는 좋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양은 미국과 다른 나라들이 언젠가는 미얀마 군부가 북한 인민군과의 관계를 청산하도록 파고들 것이라는 걱정을 해야만 할 것이다. 예컨대 네피도는 미국의 압력을 받고, 고려광업개발무역회사와 연루되어 있고 재무부가 제재 대상으로 지정한 인물인 김철남에게 6월에 미얀마를 떠날 것을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미얀마 군부 정책 결정의 불투명성으로 인해, 워싱턴이 이러한 목표를 얼마나 성공적으로 달성했는지를 평가하기는 어렵다. 양국 군부 사이에 협력이 감소되었다면 얼마나 감소되었는지, 미얀마의 전환과정이 시작되기 전에는 협력이 얼만큼 실질적이었는지, 파악하기 조차 어렵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 미얀마에 대한 미국의 제재를 해제하는데 걸린 긴 과정을 보면, 중대한 제재 압력을 네피도에 다시 적용할 것 같지는 않다. 샨(Shan)과 카친 (Kachin)주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라카인(Rakhine) 지역의 이슬람교도에 대한 가혹한 탄압이 지속되는 한, 워싱턴은 군사적 협력을 많이 제공할 수 없다. 평양과의 “정략결혼”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대체로 미얀마 군부에게 달려 있다. - 1) “Burma” was renamed “Myanmar” in 1989; “Rangoon” was renamed “Yangon.” 2) Bertil Lintner, Myanmar, North Korea in missile nexus, Asia Times Online, March 2, 2011. http://www.atimes.com/atimes/Southeast_Asia/MC02Ae01.html. 3) Author interview in Min Hla, April 2016. 4) Bertil Lintner, Tunnels, Guns and Kimchi: North Korea’s Quest for Dollars – Part I North Korea digs tunnels for Burma’s brutal, secretive regime, YaleGlobal, June 9, 2009. http://yaleglobal.yale.edu/content/NK-quest-for-dollars-part1. 5) Dulyapak Preecharushh, "Myanmar's New Capital City of Naypyidaw" in Engineering Earth: The Impacts of Megaengineering Projects, ed. By Stanley D. Brunn (New York: Springer, 2011), 1029. 6) Ali Fowle and Robert E. Kelley, Nuclear Related Activities in Burma, DVB Report, May, (2010): 33. 7) Ibid. 27. 8) "Burma, North Korea Said To Expand Military Ties", Radio Free Asia, February 2, 2009. http://www.rfa.org/english/news/myanmar/nkorea-07012009231914.html. 9) Author interviews with senior officials in Naypyidaw, 2017. 10) Author interviews with Tay Za, July 2014. * 이 글은 필자가 38NORTH에 기고한 "Myanmar-DPRK’s “Marriage of Convenience”–Headed for Divorce?" (2017.8.25) 중 필요부분을 발췌, 수정, 전재하였음을 밝혀 둡니다. - 안드레이 아브라하미안(Andray Abrahamian)은 제주평화연구원 객원연구위원이다. 울산대에서 강의를 했고, 북한 사람들에게 기업가 정신과 경제 정책을 교육하는 비영리회사 ‘조선익스체인지(Choson Exchange)’의 전무이사를 역임했다. 집필 중인 북한과 미얀마를 비교한 책을 곧 출간할 예정이다. - 와이 모(Wai Moe)는 뉴욕타임즈의 미얀마 문제 리포터이자, 자유기고가이다. 2012년 타임즈에 합류하기 전에는 이라와디 잡지(the Irrawaddy magazine)에서 일을 했다. 1990년대에 5년간 양심수로 복역하였다.
  • 올림픽 평화를 지향하며
    저자
    김재한 (한림대학교)
    발간호
    2017-52
      올림픽은 인류 최대의 축제다. 개최 훨씬 이전부터 분위기가 고조되는 게 일반적이지만 평창 동계올림픽은 국내정치 문제 때문에 대한민국 국민의 관심을 진작 받지 못했다. 올림픽 개최 4~5개월을 앞둔 시점에서야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데, 이것 역시 세계인이 평창에 모여 성대한 축제를 갖는다는 부푼 기대가 아니라,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로 평창 올림픽이 제대로 개최될 수 있을까 하는 우려에서다. 예컨대 지금 미국 솔트레이크에서 열리고 있는 미국올림픽위원회(USOC) 미디어 서밋에서 평창조직위원회는 평창 올림픽 경기보다 주로 북한 문제에 대해 답변하고 있다고 한다. 평창 올림픽이 지향하는 올림픽 평화는 무엇이야 할까? 올림픽 평화의 정확한 명칭은 올림픽 휴전이다. 전쟁이 끊이지 않는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기원전 776년 전투를 잠시 중지하려는 목적으로 올림픽을 개최하였는데, 이것이 올림픽 휴전의 기원 에케히리아(ekecheiria)다. 전쟁 상태를 올림픽 개최로 완화하려는 노력인 올림픽 휴전은 1,200년 이상 비교적 잘 지켜졌다. 이에는 그리스라는 공유된 정체성도 일조했다. 기원전 481년의 에케히리아는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침공하던 상황에서 이뤄진 그리스 도시국가 간의 합의였다. 1892년 쿠베르탱(Pierre de Coubertin)은 유럽 각국이 갖고 있던 증오와 긴장을 스포츠로 해소시키려는 목적으로 올림픽 재건을 주창했다. 그러나 1896년 근대 올림픽의 창설부터 냉전의 종식까지의 약 100년 동안 올림픽은 평화는커녕 휴전조차 성사시키지 못했다. 1916년 올림픽은 독일의 호전적 성향을 억제하여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베를린에서 개최하기로 결정됐지만 제1차 세계대전으로 취소되었다. 또 1940년 올림픽도 본래 도쿄에서 열리기로 되었다가 일본이 중일전쟁으로 자의반 타의반 개최권을 반납했고, 헬싱키로 개최 장소가 바뀐 후 다시 제2차 세계대전으로 결국 취소되었다. 런던에서 개최키로 결정된 1944년 올림픽 역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취소되었다. 제국주의 시대와 냉전 시대에는 올림픽이 전쟁을 예방했던 사례보다 오히려 올림픽이 전쟁 때문에 취소되거나 일부 국가의 보이콧으로 파행된 사례가 훨씬 더 많다. 냉전이 종식되자 올림픽 휴전은 다시 기능하기 시작했다. 1991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유고슬라비아를 제재하자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올림픽을 제재 수단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유엔에 요구했고 유엔은 이를 받아들였으며 내전 중인 구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선수들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참가할 수 있었다. 1993년 IOC는 184개국 국가올림픽(National Olympic Committee)의 서명을 받아 갈리(Ghali) 유엔 사무총장에게 1994년 올림픽 휴전에 관한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1993년 유엔 총회는 올림픽 휴전 결의문을 121개국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이후 유엔은 올림픽 경기 개최 1년 전에 올림픽 휴전 결의문을 통과시키고 있다.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때에는 수단인민해방군(Sudanese People's Liberation Army)과 정부군 사이에, 또 조지아(Georgia)와 아브하지아(Abkhazia) 간에 휴전이 성사되었다. IOC 대표단은 릴레함메르 올림픽 경기 기간에 전쟁의 도시인 사라예보를 방문했다.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경기 때에는 유엔과 IOC가 유엔과 이라크 정부 간의 양해각서 체결을 성사시켜 이라크 전쟁의 재발 방지에 기여하기도 했다. 평창올림픽을 4개월여 앞둔 지금, IOC의 적극적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IOC는 모스크바 올림픽과 로스앤젤레스(LA)의 반쪽 올림픽 이후 개최지를 바꾸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착시켰다. 또 올림픽 경기 초청장을 발송하는 주체를 올림픽조직위원회(Olympic Organizing Committee)에서 IOC로 변경함으로써 조직위원회의 행사라기보다 IOC의 행사라는 모양새를 갖추어 참가를 독려해 왔다. 올림픽 헌장을 비롯한 여러 IOC 문헌에는 올림픽 경기가 국가 간 경쟁이 아니고 선수 간 경쟁이며, 또 IOC 위원은 IOC에서 자국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에서 IOC를 대표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 맥락에서 민족통일의 가치가 IOC의 호감을 늘 받는 것은 아니다. 독일 베를린은 통일된 후 2000년 올림픽을 유치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2000년 올림픽 유치를 신청한 중국 베이징도 대만에서 일부 종목을 개최하겠다고 발표했었지만 2000년 올림픽을 유치하지 못했다. 8년 후 베이징은 대만과의 공동개최에 대한 언급이 없는 2008년 올림픽 유치 신청서를 제출하고서야 개최권을 받았다. 한 국가의 통일이 주변국에 긴장과 경계심을 유발할 때에는 오히려 올림픽 유치와 개최에 불리하게 작동할 수도 있는 것이다. 평창의 경우, 2010년 올림픽의 후보도시가 되기 위한 평창 최초의 신청도시 파일은 참혹한 전쟁으로 분단된 강원도를 강조했다. 세계에서 중동 다음으로 화약고라고 말할 수 있는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평화 올림픽을 개최하여 전쟁을 예방하는 것이 올림픽 목적에 가장 부합한다는 논리를 담았다. IOC의 첫 반응은 감동 그 자체였고 평창은 최종 파일에서도 분단과 전쟁을 강조했다. 그러나 IOC 위원들의 투표 결과는 캐나다 밴쿠버의 승리였다. 4년 후 동족상쟁, 민족분단, 가족이산 등 동일한 내용은 IOC 위원들 다수를 충분히 감동시키지 못했고 2014년 올림픽 개최권은 러시아 소치에게 갔다. 평창은 북한이 거의 공식적으로 지지했던 2010년 및 2014년 올림픽의 유치에 실패한 반면에, 북한이 공식적으로 지지 의사를 표명하지 않은 2018년 올림픽의 유치에 성공했다. 올림픽 개최에 차질을 주지 않을 남북한 화해는 올림픽 유치에 도움 되었겠지만, 남북한 통일을 위해 올림픽을 유치해야 한다는 주장은 국제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남북한이 통일되어 서부 비무장지대(DMZ)를 경기장으로 활용하겠다는 신청서류를 IOC에 제출하면 하계올림픽을 당연히 유치할 것이라는 일부의 주장도 IOC 분위기와는 동떨어진 생각이다. 민족이나 통일과 달리 평화에 대한 IOC나 국제사회의 호응은 결코 작지가 않다. 여러 나라의 평창 올림픽 불참 가능성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전개되고 있는 올림픽 참가 홍보에서도 이를 감안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IOC의 단호한 개최 의지가 담겨져야 한다. 그러한 의지는 과거 몇 차례 있었다. 멀리 1972년 뮌헨 올림픽 때 ‘검은 9월단’이 이스라엘 선수단을 죽이고 인질로 잡으면서 경기가 한때 중단되었지만 34시간 만에 속개되어 평화 올림픽의 의지를 보인 바 있다. 가까이는 서울 올림픽 때 IOC는 적극적인 개최 의지를 밝혔다. 1981년 서울이 1988년 올림픽을 유치했을 때 북한은 한반도가 아직 전시 상태라는 이유로 개최 변경을 요구한 바 있다. “IOC는 전쟁 또는 교전상태를 공식 인정할 수 있는 경우 해당 도시에서의 올림픽을 철회 가능”이라는 IOC 헌장의 규정을 들어 전시 지역인 서울에서 올림픽을 개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특히 서울은 데모 등 정치적으로 불안하고 핵무기 배치 등 전쟁위험 지역이며 북한 선수단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곳이고, 서울만의 올림픽 개최는 영구분단을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실제 1987년 대한항공 858기 폭파 사건 등 여러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88년 서울 올림픽은 성공적으로 개최되었다. 30년이 지나 다시 한반도에서 열리는 올림픽 게임을 앞둔 지금,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개발로 긴장이 고조되어 있다. 평창 올림픽은 북한이 앞으로 가할 수 있는 위협의 패턴을 보여줄 시금석이기도 하다. 평창 올림픽 경기가 개최되는 기간에는 북한을 포함하여 누구든 전쟁 행위를 감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전 세계를 상대로 싸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평창 올림픽 때야말로 한국을 가장 안전하게 방문할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 국제사회의 단호한 의지가 동반된 진정한 평화 올림픽을 평창에서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올림픽의 정치군사적 효과는 이 글 주요 내용의 출처인 다음 문헌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김재한, “올림픽의 평화 및 통일 효과” 『통일문제연구』 제24권 2호(통권 제58호), 2012년 하반기. 現 한림대 정치행정학과 교수.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로체스터대학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 2009년에는 미국 후버 내셔널 펠로우, 2010년에는 교육부 국가석학으로 선정.